26년 독서일기 4 - 계절산문

4. 계절산문-박준

by GIL

계절마다 적어내려간 시인의 글에서 계절과 다정함이 흘러 넘친다.


내가 최근에 간 구례와 사랑해 마지않는 밀양, 그리고 항상 궁금해했던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한다. 굽이굽이 계절이 변할 때마다 곁에 두고 읽고싶어지는 책이었다.



P.67

그 때 저는 침묵도 부드럽고 다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침묵을 불편해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침묵의 시간을 보내는 일이 참 귀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어떤 말이 침묵을 닮았고 또 어떤 말은 침묵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그때 배웠습니다.



P. 142

며칠 전 경상남도 밀양을 지났습니다. 한 번 제대로 가본 적 없는 밀양이지만 이처럼 길 위로 지난 것은 여러 번 입니다. 그때마다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언제 아무런 일도 없이 밀양에 와야지, 여행이라 할 것도 없이 밀양에 와야지, 와서 며칠이고 머물러야지, 하고 말입니다. 이것을 두고 소망이나 소원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너무 거창하겠지요. 그러니 희망쯤으로 해두겠습니다.

희망하던 그날이 오면, 저는 아마 밀양에서부터 걸음을 시작할것입니다. 역 밖으로 나와서 가장 먼저 그동안 간판만 보며 군침을 삼켰던 밀면집에 들어갈 것입니다. 오후 두 시 정도 되는 늦은 점심이나 오후 다섯시쯤 되는 이른 저녁에 들어서서 혼자 테이블에 앉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비빔밀면과 물밀면 사이에서 고민할 것입니다. 만두나 전병처럼 곁들일 수 있는 음식이 있다면 혼자 왔다는 미안함을 핑계삼아 함께 주문할테고요.

밀면을 먹으면서 누구를 떠올리게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유난히 신맛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를 떠올릴 수도 있고, 면요리를 먹을 때면 함께 들어 있는 삶은 계란을 남겨두었다가 마지막 남은 면발과 함께 먹던 사람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혹은 지금은 제가 생각하지 못할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누가 되었든 그리울 것입니다. 누가 되었든 그리워서 더 좋아질 것입니다.


밥을 먹고 나온 후에는 천변을 걸을 것입니다. 밀양강은 조금 더 남쪽으로 흘러 삼랑진쯤에서 낙동강과 만나며 스스로의 이름을 숨기게 됩니다. 천변을 걷는 동안 상상력이 좋지 않은 저는 분명 <밀양아리랑>의 노랫말을 더듬어볼 것입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로 시작되었다가 "정든 님이 오셨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으로 이어지는 노랫말입니다.

저녁이 깊어지면 숙소도 하나 구할 것입니다. 가방을 내려두고 거칠어진 몸을 씻을테고 자리에 누워서는 아마 한참을 뒤척일 것입니다. 뒤척이다 뒤척이다 새벽쯤에야 깊은 잡이 들었다가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뜰 것입니다. 눈을 뜨고 나서는 앞에 펼쳐진 낯선 풍경 탓에 아주 잠시나마 멍해지기도 하고요. 그러고는 이내 밀양을 떠날 것입니다.


P.154

사찰에서든 교회에서든 성당에서든, 제가 비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저는 아무것도 빌지 않게 해달라고 빕니다. 이 기도에는 욕망을 줄여 마음과 몸을 간소하게 살고싶다는 뜻도 있지만, '아무것도 빌지 않아도 될 만큼 평온한 일들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큰 욕심도 있습니다. ... 하지만 제가 그곳에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르고 빌었던 기도는 여전히 같은 것이었습니다. 삶이 변할수록, 변하지 않는 믿음을.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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