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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Mar 11. 2022

말하기를 좋아하던 아이

나는 말하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조잘조잘 내 목소리로 생각을 표현하는 게 참 좋았다. 말을 하면 이목이 집중됐다. 어린 녀석이 말을 참 잘 하네. 칭찬을 들을수록 겁없이 말을 뱉었다. 내 생각을 막힘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는 게 내게는 한때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면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았으니까.


말빨이 좋다보니 말싸움을 하면 늘 이길 자신이 있었다. 감히 나를 말로 이기겠다고, 하는 마음이랄까. 말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건 말빨 따위 상관 없는 일이라는 걸 깨달은 건 처참하게 말싸움에서 진 이후였다. 좋아하는 친구와 오해가 쌓여 다툼이 벌어진 날, 나보다 평소 훨씬 말주변이 없던 친구는 나보다 더 내게 적극적으로 따져 물었다. 그때 깨달았다. 애정이 있는 사이에서의 모든 싸움은 결국 애정이 더 큰 사람이 진다는 것을. 친구와 나의 서로에 대한 애정을 크기로 비교해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그 다툼에서 확실히 깨닫고야 만다. 나의 애정이 더 컸음을. 나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고 내내 눈물만 흘렸다.


시간이 많이 흘러 나는 말보다 글이 편한 사람이 되었다. 삼 년만에 만난 한 친구는 내게 이전보다 조용하다는 말을 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말로 하기가 어려웠다. 누구보다 나의 속내를 잘 아는 친구임에도 나는 말을 고르고 골랐다. 뱉는 말보다 삼키는 말이 많았다. 한때 말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곤 했던 나는 어느새 말보다는 글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만남에서 나는 말을 하면서도 글을 쓰듯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수정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었다. 조금 답답하고 조금 다행이었던 시간.


왜 글이 더 편해졌는지를 생각한다. 결국 글을 쓰는 삶을 살겠구나 생각한 게 언제인지를 더듬어본다. 긴 여행을 다녀온 뒤부터 만나는 게 꺼려지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서른이었는데 모임을 나가면 대화 주제가 늘 비슷했다. 누가 연봉이 얼마더라, 누가 어떤 스펙의 사람과 결혼을 한다더라, 누가 무슨 차를 뽑았더라, 어디 집값이 얼마더라. 한참 떠들고 돌아오면 허무했다. 왜 허무할까.


생각해보니 나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너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와 너는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이야기 하고 싶었다. 긴 여행에 대해 묻는 친구는 많았지만, 모두 질문은 같았다. 몇 개국을 돌았는지, 돈은 얼마가 들었는지, 어디가 가장 좋았는지. 내가 여행지에서 어떤 걸 느꼈는지, 긴 여행을 하며 내 마음이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그런 친구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화는 늘 부족했다. 나의 마음을 털어놓기에, 너에 대해 더 깊이 있게 알기에.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온전히 받아주는 건 하얀 지면뿐이었다. 삶이 무엇인지, 지금의 내 머릿속을 장악한 주제가 무엇인지, 내게 여행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결국 글로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내게 원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주변에 없으니, 결국 내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해야 했던 것.


어쩌면 외로웠던 것도 같다. 참 많은 고뇌의 시간들로 젊은 날을 보내야만 했던 나는 늘 청자였다. 듣는 사람. 들어야만 하는 사람. 내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결국 타인이다. 타인은 내게 오래 집중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이 바쁘고 자신의 아픔이 더 깊다. 나 역시 그들에게는 타인에 불과했으리라.


어른이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고, 말을 아끼게 되었으니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꼰대가 되고 싶지는 않으나 꼰대의 나이가 되었다. 이왕이면 더 듣는 꼰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글이라는 소중한 친구가 생겼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못다한 말은 글로 하면 되니까. 글로 쓰면 언제든 부끄러운 나의 생각을 수정할 수 있으니까. 글에서는 더 나은 사람인 척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지금의 나를 적으면 된다. 그래야 좋은 글이 된다고 믿는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하얀 백지를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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