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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Mar 03. 2022

표정이 없는 사람

 사람이 서있다. 말없이 기타를  있는 사람. 무덤덤한 표정. 적은 말수. 흐릿한 눈빛.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면 눈을 감는다. 선율에 목소리를 얹어 수줍게 자신을 꺼내 보인다. 음악 속에서만 스스로를 드러내는 사람. 음악이 없는 곳에서  사람이 짓는 표정은  가지다. 무표정하거나 시니컬하거나.  웃지도 않는다. 간혹 미소라도 지으면 감탄한다. 저런 미소가 숨어 있었구나. 표정을 아끼는 사람.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  사람은 누구일까.


인간은 누구에게 처음 표정을 배울까. 주양육자다. 아기들이 가장 흥미로워하는 볼거리 중 하나가 바로 사람의 얼굴이다. 엄마가 혹은 아빠가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을, 찡그린 얼굴을 아이는 찬찬히 살피면서 생을 시작한다. 그리고 따라 한다. 웃어보기도 하고 찡그려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혼자 캄캄한 뱃속에서 놀 때 하던 배냇짓을 서서히 잊는다.


돌만 되어도 아이는 사람의 감정을 읽는다. 주양육자의 표정을 살피며 상황을 가늠한다. 웃어야 하는 상황인지 울어야 하는 상황인지. 양육자가 행복한 육아가 결국 행복한 아이를 만드는 건 바로 이 때문. 아이는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의 표정으로 희로애락을 배운다. 인간이 생물학적인 의미이고 사람이 사회적인 의미라고 한다면, 그렇게 아기는 인간에서 사람이 되어가는 것.


표정이 없는 사람, 표정이 단조로운 사람.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감춰진 얼굴이 궁금하다. 아마도 어릴 적 다양한 표정을 보지 못했거나 커가면서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겠지. 나를 드러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며 어른이 되어간 사람들, 이런 이들에게는 말하지 못한 수많은 밤이 있다. 혼자 감내해야 했던, 속에만 꾹꾹 눌러 담아야 했던, 그런 밤들이 있다.


내게도 그런 밤이 있었다. 감추는 게, 드러내지 않는 게 미덕이라고 오해한 나날들. 그날들이 길어질수록 나는 더 심해로 들어갔다. 심해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빛이 없는 곳에 사는 동물들 중에는 눈이 퇴화된 동물도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 혼자 심해로 들어가 버리면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나도 타인도 그리고 세상도. 내가 보지 못한다는 건 세상도 나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나의 세상은 결국 나를 중심으로 하기에.


내가 심해에서 나올 수 있었던 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누군가는 사진으로, 누군가는 그림으로, 누군가는 선율로 자신을 드러내지만 내게는 딱히 방법이 없었다.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 내가 찾아낸 단 하나가 글자였다. 인간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깨우치는 글자.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인 언어. 글은 그렇게 내게 단 하나의 도구가 된다.


표정이 없는 사람은 다행히 노래를 부른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을 자신의 목소리로 한 음 한 음 채워간다. 노래 안에서만 표정을 드러내는 사람. 노래를 통해서만 자신을 꺼내 보이는 사람. 이런 사람은 끝까지 음악을 놓지 못한다. 음악이 전부인 인생을 살게 된다. 자신의 존재 의미를 음악으로만 표현하기 때문.


글을 쓴다.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을 하얀 종이 위에 하나하나 적어내려 간다. 글자가 차곡차곡 쌓여갈수록 나는 마음이 놓인다. 이렇게 나를 드러냈기에, 이렇게 지금의 나를 배설했기에, 나는 그제야 비로소 갇힌 세상에서 벗어나 열린 내가 된다. 글자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들이 결국 글을 쓴다. 가진 게 글뿐이므로. 글이라도 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으므로. 글로만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으므로.


표정이 없는 사람의 노래를 들으며, 표정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예술을 만든 건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 표정으로 차마 나를 드러낼 수 없기에, 글로 음악으로 그림으로 나를, 그리고 내가 바라본 세계를 드러내는 게 아닐까. 인간은 무언가 배설할 수단이 필요하다. 나를 드러내고자 한다. 타인이 나를 알아주었으면 한다. 나를 배설하는 욕구는 본능에 가깝다. 슬픈 표정으로 나를 알려 위로를 구하고, 벅찬 선율로 나를 알려 기쁨과 슬픔을 나눈다. 그게 인간이다. 그렇게 인간은 사람이 되기 위해 일평생 몸부림을 친다.


많은 이들이 글을 썼으면 좋겠다. 나를 드러내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글로 대신 자신의 표정을 말해주었으면 한다. 우리는 다행히 태어나 모두 글자는 배웠으므로. 조금 서툴러도 괜찮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으므로. 그렇게 글로 당신을, 당신의 세상을 표현하면,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면 세상은 조금 덜 아파지지 않을까. 세상은 조금 더 살만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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