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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Feb 12. 2022

내 글의 나이는 몇 살일까

글의 나이를 드러내는 건 문체일까, 생각의 깊이일까

애늙은이. 말이나 행동이 나이에 비해 너무 어른스러운 아이를 놀리는 말. '놀리는'이라는 수식어가 자못 뼈아프다.


나는 애늙은이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이전의 나는 그래도 좀 어린이다웠지만, 저학년을 지나면서 나는 더 이상 어린애답지 않은 아이가 되었다. 애늙은이가 되는 건 기질의 문제도 있지만, 환경의 문제가 가장 큰 듯하다. 어리광을 부릴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보통 애늙은이가 된다.


고등학교 때 이미 나는 친구들로부터 시집가도 되겠다는 말을 들었다.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아파도 나를 돌봐달라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눈치와 행동이 친구들보다 빨라 문제가 생기면 남들이 알기 전에 해결하곤 했다. 한 번은 친구가 학교에서 갑자기 쓰러진 적이 있었는데 모두들 당황하고 있는 동안 나는 흔들림 없이 119를 불렀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쉽게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눈물을 흘릴 줄도 몰랐다. 그 시절 눈물을 흘리는 건 내게 나약함을 드러내는 일과 동의어였다. 한 친구는 내게 말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다고.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게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는 게 오히려 더 건강한 일이라는걸 알게 된 것도, 우는 법을 배운 것도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스무 살이 넘고도 내가 어른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애늙은이로 오래 살아왔지만, 실제 어른의 나이가 되는 것과 스스로를 어른으로 인식하는 건 괴리가 있었다. 마흔이 되어서야 나는 내가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어른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둘이나 낳아 키우고도 한참이 흐른 뒤였다. 그렇게 어른이 됐다고 느끼면서 나는 나이를 크게 신경 쓰며 살고 싶진 않지만, 나이에 걸맞은 사람으로 살아가야겠다는 모순된 다짐을 했다.


얼마 전 한 지인으로부터 내 글이 내 나이보다 더 연배가 들어 보인다는 반응을 듣고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글에서 나이가 드러나는 건 왜일까. 문체 때문일까, 생각의 깊이 때문일까. 어린 작가의 경우 자신의 글이 너무 가벼울까 봐 걱정이 될 수도  있다. 나이 든 작가라면 자신의 생각이나 문체가 낡은 것일까봐 염려가 될 것이다.


오랜 시간 글을 써오면서 사실 내 글의 나이에 대해 신경을 써본 적은 없었다. 더 예민하게 세상을 탐지하려 애쓰고, 삶의 모퉁이마다 느꼈던 감정과 깨달음을 글에 녹이려 했을 뿐이었다. 글은 결국 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내 글의 나이가 내 나이와 비슷하게 느껴질까에 대해서는 고민한 적이 없었던 것. 나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내 글의 나이는 몇 살일까.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은 해맑은 뻔뻔함이 있는 사람이다. 해맑은 뻔뻔함은 제 나이에 맞게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안정된 가정에서 나이에 맞는 대우와 사랑을 받으며 자라온 사람만이 이런 면을 내면화한다. 그러니까 나는 애초에 그런 뻔뻔함을 가질 수 없었다. 살려면 애늙은이가 되어야 했지 애가 될 수는 없었다. 해맑은 뻔뻔함은 자신이 갖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런 점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쉽게 마음을 빼앗겼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걸 그들은 갖고 있었으니까.


해맑은 뻔뻔함을 갖지는 못했지만, 나는 의외로 농담하기를 좋아한다. 남을 웃기는 것에 욕심이 있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과 있으면 나는 나를 낮추기 위해 광대를 자처한다. 오랜 습관 같은 것이다. 내 글보다 나라는 사람을 먼저 알게 된 사람들은 내 글을 보고 좀 놀란다. 긴 시간 생각해온 고민과 생각들을 글로 쓰는 경우가 많다 보니 글로 만나는 나는 너무 심오하고, 어둡다는 것. 광대일 때의 모습을 내 글에 담아본 적은 그러고 보니 거의 없다. 그런 나까지 담아낸다면 내 글은 내 나이로 보일까.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 객관적으로 내 글을 바라보지 못한다. 내 글에서 어떤 향기가 나는지 알지 못한다. 내 글에 대해 내가 주변으로부터 들은 평은 곧다, 담담하다, 힘이 있다, 우아하다 정도. 타인의 글은 어떤 향기가 나는지, 어떤 마음 상태로 쓴 것인지가 꽤 투명하게 보이지만 내 글은 도무지 제대로 바라보기가 어렵다. 내게 문체라는 게 있다면 오랜 시간 글을 쓰면서 굳혀진 일정한 표현들 때문이겠지.


내 안에는 수많은 내가 산다. 늘 같은 모습일 수는 없다. 함께 하는 사람에 따라 나는 가면을 바꿔 쓴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 어떤 글을 쓰느냐에 따라 나는 달라진다. 에세이를 쓸 때는 좀 더 진솔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담으려 노력하고, 사회에 연관된 글을 쓸 때는 주제의 민감도에 따라 발랄함을 꺼낼 때도 있고 진중함을 보일 때도 있다. 글에 따라 걸맞는 가면을 고르고 글을 써 내려간다. 글은 나이지만, 나의 모든 것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나의 일부를 담을 뿐이다.


어쩌면 나는 아직 글 속에 나를 오롯이 담아내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진짜 나를 감추고 애늙은이로 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처럼 글에서도 애써 솔직한 나를 감추고 어른스러운 나만을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괴리가 결국 나와 내 글의 나이가 불일치하는 이유일지도. 그게 아니라면 나는 타인보다 좀 더 빨리 나이를 먹어가는지도 모른다. 글을 쓴다며 예민하게 감각을 세우고 살아가느라 남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내면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느 쪽일까.


스물다섯을 넘긴 뒤로 예쁘다는 말보다는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는 말이  반가웠다. 글은 어떨까. 지인의 반응에 나는 오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생각이 깊다는  칭찬이었지만 문체 때문이라면 그건 간과할  없는 문제였다. 내가 원하는  글의 나이는  살일까. 글의 나이는 결국 문체가 아닐까. 그렇다면 늙지 않는 문체는 무엇일까. 그런 문체는 어떻게 만들  있을까. 이미  글의 나이가 정해진 거라면 나는  살쯤 글과 실제 나이를 일치할  있을까. 쏟아지는 수많은 질문들.


은희경 작가의 최신작을 읽으면서 예순이 넘은 작가의 필력과 젊은 감각에 감탄을 했다.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작품을 읽는다면 결코 이 작가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대해 인간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갖되, 늙지 않는 문체를 갖는 것.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 아닐까.


깊은 생각을 하고 싶지만 낡은 사고방식을 갖고 싶지는 않다. 깊은 생각을 글에 담고 싶지만 늙은 문체를 갖고 싶지는 않다. 나는 어떻게 나이 들어가야 할까. 나는 어떤 글을 써야 할까. 이 고민은 언제까지 계속 될까. 글을 쓰는 삶을 살려면 내내 이 생각 속을 방황해야 하는 걸까. 꼼짝없이 도돌이표 속에 갇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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