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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Dec 30. 2021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

쓰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


'글을 쓰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든 건 재작년 가을이었다. 무슨 맥락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흐린 오후 그 생각을 떠올리며 한참 눈물을 흘렸다. 쓰고 싶은 글이 있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증언하고 싶은 삶이 있고 살기 위해 쓸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 있다. 내게 글은 숨을 쉬기 위한 길이자 내 삶에 의미를 불어넣는 유일한 길이었다.


데칼코마니처럼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캄보디아에서 태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아침, 수많은 전세계 여행객들이 커다란 등짐을 메고 하나둘 정류장으로 모여들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아침이었다. 그 많은 여행객들을 가만가만 들여다보면서 기간도 목적지도 없는 여행을 한 번이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일 년 뒤 정말 그런 여행을 떠났다. 모든 걸 버리고, 내려두고, 그저 떠났다.


지금도 그때 그 여행의 기억으로 현재를 살아간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 여행은 아직 책이나 사진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내 기억 속에만 완전한 모습으로 저장되어 있는 여행. 드러내 보이지 않은 건 여행이 나를 위한 것이었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나는 누구에게나 꺼내 보일 수 있는 그럴싸한 여행이 되기를 바랐다. 책 한 권쯤은 뚝딱 쓰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가득한 여행이기를 빌었다. 수만 장의 사진을 찍고 틈틈히 글을 썼지만 사진은 거의 현상하지 않았고 그 어떤 책도 펴내지 않았다.


여행에 지쳐가던 어느 날 무언가 보여주기 위한 여행으로 완성되기 전에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 속에 갇힌 스스로를 발견했다. 그건 나를 위한 여행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내 시간의 정당함을 알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걸 깨닫고 스스로를 설득시켰다.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아. 책 따위 쓰지 않아도 괜찮아. 빈손으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결코 빈손이 아니야. 내 여행이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아니야. 그렇게 나는 아무것도 손에 쥐지 않은 채 제자리로 돌아왔다.


기억은 조금씩 희미해진다. 그전에 조금이라도 더 꺼내어 글로 써두어야지 다짐을 한다. 그렇다 해서 그 행위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행위는 아니다. 나는 나를 위해 여행을 기억한다. 내 영혼의 갈증을 풀기 위해 나의 기억을 뒤져내 허기진 마음을 채운다.


글을 쓰려는 것도 사실 나 자신을 위해서다. 난 나를 달래기 위해, 나의 아픔을 안아주기 위해,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 글을 쓴다.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누군가에게 내 삶을 전시하거나, 누군가에게 나처럼 살라고 권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그저 내가 더 나은 사람으로 살고자 해서, 내가 글을 통해 숨을 쉬고 싶어서 글을 쓴다. 쓰고자 한다.


글을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지 정확히 일 년이 지나 거짓말처럼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행을 떠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한 뒤 일 년이 지나 진짜 여행을 떠난 것처럼, 나는 이제 글을 쓴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나는 매일 글을 쓴다. 그 길 끝에 돌아오기에는 초라한 것들만 손에 쥐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계속 쓸 것이다. 나를 온전한 나로 살게 하는 단 하나, 글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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