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청하의 노래가 생각나는 요즘이다. 뭘 한 게 있다고 "아니 벌써 12월~" 차라리 12시가 낫겠고만 지금이 2023년의 12월이란다.
올해도 여전히 빠르게 흘렀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9월부터 시작된 뭔지 모를 압박감과 가슴 두근거림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11월은 퇴사를 해보고자 많은 기를 썼다. 물론 아직은 상상만으로 그 사람 얼굴 위에 사직서를 던지는 게 고작이지만 진지하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왔다.
12월이다. 올해 초 브런치에 한 달에 두 번, 즉 격주에 한 번씩은 반드시 글을 쓰리라 다짐했건만 한 달에 한 번도 겨우 쓰는 수준이 되었다. 별로 속상하지 않을 걸 보면 어쩔 수 없는 해였거나, 아니면 그냥 포기한 거거나. 소설을 써보겠다고 몇 글자를 끄적거리다가 잠시 멀어진 거라고 위로해 본다. 원래 나는 두 마음을 모두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므로. 아주 잠시 한 눈을 팔았다가 짝사랑에 데었다고 해두지.
그러나 꾸준히 해낸 것도 있다. 출판사에서 받은 책의 서평을 진지하게 썼고, 개인적으로 잘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남기기도 했다. 그중 한 편은 우수 서평으로 뽑히기도 해서 하루종일 기분이 좋은 날도 있었다. 그나마 꾸준히 한 일이 이 한 가지밖에 없다는 걸 지금 글을 쓰면서 알았지만 이거라도 어디냐고..
올해는 유독 고전 소설을 많이 읽었다. 이디스 워튼의 「버너자매」, 비타 색빌웨스트의 「모든 열정이 다하고」,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 브라이언 무어의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폰 아르님의 「 4월의 유혹」, 위니프리드 홀트비의 「불쌍한 캐럴라인」,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 에밀졸라의 「목로주점」까지..
고전보다는 현대를, 소설보다는 에세이를 더 좋아하던 내가 고정된 취향을 넓혀 새로운 장르 영역을 기웃거리기 시작한 건 꽤 고무적인 일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고전소설 중에서도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인데 이런 캐릭터들은 언제나 내 인생의 안도감과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출근하는 지하철을 기다리며 이들의 서사에 감정이입하면서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낼 수 있기를' 스스로에게 행운을 자주 빌었다. 내가 나를 믿고 세상에 나아가는 일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 또 있을까 싶어 그럴 때마다 책 속으로 숨어 조용히 희망을 적립하는 습관은 올해도 꽤 유효했다.
적고 보니 올해는 아주 소소한 일탈을 자주 한 것 같다. 더운 여름날 월요일마다 맛있는 아이스라테를 사서 출근하기도 했고(원래 돈 아까워서 잘 안 삼), 종이책의 로망을 고집하기보단 이북의 편리함을 수용했고(시력은 잃는 것 같지만), 관심 있던 음지 분야의 공부를 온라인으로 시작했다. 몇몇의 변화가 어색하고 떨렸지만 오랜 고민 끝에 조심스레 시작하면서 성공과 실패를 떠나 도전 자체가 즐거움이 되는 일이 많았다. 가장 기뻤던 건 엄마가 좋아하는 트로트 가수의 콘서트 티켓에 성공한 일인데 휴대폰을 접속하자마자 대기 10만 명을 보니 오랜만에 가슴이 떨렸다.
오~ 이런 느낌! 요즘 효도는 이렇게 이뤄진다고?!
소소한 즐거움 뒤엔 지루하고 끝이 없는 우울감이 함께 왔다. 감정적으로 많이 지쳐서 여행도 다녀오고 물건으로 마음을 사는 것으로 달래 봤는데, 반짝 짧은 행복으로 끝난 것도 있지만 길게 여운을 남는 것들도 있었다. 가령 런던에 다녀온 일이나 브랜드 빈티지 손목시계를 산 일은 사진으로 추억하고 매일 시계를 착용하면서 멀리멀리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현실에 붙여 놓았다. 이래서 돈은 전부는 아니어도 있으면 소중히 다뤄야 하는 중요한 거다. 돈으로 사는 모든 마음과 열정이 다 나쁜 건 아니거든. 우리는 뭔가를 살 때 진심으로 원하고 그걸 갖고 이루는 순간 즐겁고 행복할 우리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시간을 보낼 때 기뻐한다. 원빈이 송혜교에게 물었던 "얼마면 돼"는 그런 면에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할 수 있는 완벽한 대사였다. 그는 돈의 순기능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남자의 진심을 돈에 담았을 뿐이지 그 마음이 나쁜 건 결코 아니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음을 알게 된 이상 나는 앞으로 생각이 단단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조건 돈을 좇을 게 아니라 돈을 버는 마음과 돈을 좋은 곳에 쓰는 마음의 적절한 균형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더 많이 알아내겠단 뜻이다. 그러려면 더 많이 책을 읽고, 더 자주 글을 쓰고, 비쌀지언정 내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좋은 물건을 알아보는 안목을 키워 더 성숙하고 창의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는 조직에서 요구하는 변화에 대해 거부하고 움츠렸다면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그 변화를 인정하고 수용해야 할 것 같다. 익숙하게 해 왔던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기기와 도구를 이용해 다른 방식으로 작업을 해내는 게 올해 남은 숙제인 듯하다.(AI.. 너란 놈..) 사실 이것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크고 꿈에서까지 괴로운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현명하게 극복해내고 싶다. 아마도 돈을 제대로 쓴다는 건 내 일을 좀 더 전문적인 시선으로 효과적이게 운용할 수 있는 곳에 투자하는 것일 테니 억지로 누가 시켜서 하는 마음으로 하지 않고 유연한 태도를 가지고 넓게 바라보고 싶다.
언제나 변화는 두렵다. 두려움은 사람을 예민하게 만들고 주변 모든 것을 매몰시키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좁게 만든다. 그걸 알면서도 두려운 마음을 깨는 건 늘 힘들고 실패를 반복하지만 아주 조금씩 각도를 틀어 나선형 모양으로라도 전진하고 싶은 마음이 변화의 시작이다.
변해야 하는 마음이 무섭고 쓸쓸할 때 필요한 건 행운'이 아닐까?
나의 노력과 진심에 상관없이 복불복으로 얻는 행운에 기대고 싶을 때, 그래서 스스로 말해 본다.
행운을 빌어요!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