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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Sep 22. 2024

비밀스러운 열정

05

 친정어머니는 홍남이의 남편이 죽고 딸이 혼자가 되자마자 걱정스러우면서도 차분한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 남이야. 이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 병든 남편이라도 여자한텐 남자가 있어야 든든해.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널 쉽게 안 본다. 그러니 누가 남편은 뭐 하냐고 물어보면 죽었다고 얘기하지 마라. 자식도 둘 다 미국에서 공부한다고 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늘 자식이 없는 딸을 안쓰럽고 슬프게 바라봤다. 조카들이 크고 걷고, 뛰고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은근슬쩍 딸의 눈치를 보며 마음껏 손주도 안아주지 못했다. 홍남이와 있을 때는 무자식 상팔자라 네 인생이 최고로 가볍고 좋다고 말하는 동시에 늘 눈은 고운 자식의 그 자식에게 가 닿아 있었다. 그런 어머니 속내 모르는 것 아니었지만 한편으로 속상하고 또 한 편으로 애닳는 홍남이의 마음도 편치 않았고 차라리 대놓고 긴 한숨을 간간히 내쉬는 시어머니 쪽이 더 솔직하게 느껴지는 때도 많았다.


- 엄마도 참. 남편이야 그렇다 쳐도 어떻게 없는 자식을 있다고 그래요. 이 세상에 자식 없는 사람이 나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요. 다들 잘 살고 있는데요.


- 그건 네가 뭘 몰라서 그런다. 우리 동네 할망구들이 다 앉아서 하는 얘기가 뭔지 알아? 다 지 자식들이랑 손주들 자랑이야. 자랑할 것 없는 망구들도 뭐라도 한 마디씩 거든다. 이제 자기들은 다 늙어서 자랑할 것두 없어. 그저 지 핏줄이 자기들인 것마냥 사는 거야. 그게 또 얼마나 마음이 든든하게. 저 멀리 미국에 있어서 10년에 한 번씩 본다고 해도 아예 없어서 못 보는 것과는 어깨 펴지는 게 천지차이야. 할망구들이 등 뻣뻣하게 펴고 다니는 건 다 자식들 때문이다.


 홍남이의 친정어머니는 사위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홀로 남겨진 딸이 걱정되어 한숨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야위었다. 과거 홍남이가 몇 번의 유산을 거듭하면서 지역마다 용하다는 점집과 한약방을 차례대로 다녔고 유명하다는 절을 찾아 무릎 연골이 떨어져 나가도록 기도했지만 귀신도, 약도, 신 그 누구도 그녀의 간절한 소원은 들어주지 않았다. 엄마로 느끼는 행복과 만족이 제 자식에게 주어지지 못한다는 생각에 더욱 처절하게 모든 것들에 애원했지만 건강했던 사위마저 딸 곁을 떠났다.


 처음 사위가 병에 걸려 침대에 누워 있을 때는 곧 건강하게 일어날 줄 알았다. 인생에 잠시 시련이 있는 거라고, 내 딸이 엄마가 되지 못하면 아내로서 더 오랫동안 행복해야 한다고 바랐던 자신의 믿음이 10년 동안 천천히 무너졌고 결국 딸은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지고 말았다. 장례를 치르고 딸과 집에 돌아오던 날. 화장실 문을 잠그고 한참 동안 소리 먹은 울음을 터트렸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엄마에게. 당신이 하늘에 있다면 손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길게 늘어뜨려 달라고 말하고 또 말했다. 오랫동안 혼자 있을 딸 곁에 가능한 길게 남아 있고 싶다고. 이제 자신의 단 한 가지 삶의 의지는 딸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엄마에게 부탁했다.


 홍남이는 한 달에 한 두어 번 친정어머니를 뵈러 요양원을 찾았다. 다녀올 때마다 근심 어린 얼굴로 자신의 손등과 어깨, 등을 어루만지며 자신의 생애를 조금 더, 조금 더 연명하려 애쓰는 엄마를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소름 끼치는 표정을 짓게 되지만 그 모든 것이 다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아무리 형제가 있어도 멀리 사니 남이라고, 조금씩 돈이 쥐어지면 허튼데 쓰지 말고 무조건 은행에 넣어두고 나중에 더 늙으면 아껴 쓰라는 잔소리도 더해가며 본인이 작게 모아 놓은 돈을 딸 손에 쥐어 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홍남이는 불편하면서도 아흔이 다 되어도 여전히 자식 걱정에 촛불처럼 흘러내리는 어머니의 마음이 가슴 아팠다. 내게 번듯한 자식이 있었으면 어머니의 마음이 한결 든든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불효였다. 다른 게 효도가 아니라 자식을 낳아 손주 하나 어머니 품에 넣어 드리는 게 자식의 도리였다. 하지만 인생은 어쩔 수 없는 것. 모든 사람이 부모의 삶을 살 수 없듯이 자신의 생은 다른 길이라 받아들일 뿐이었다. 어머니가 그토록 천지사방을 다니며 딸의 임신을 위해 기도하러 다니는 것을 알고 당장 그만두시라 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머니의 속병이 깊어질 것을 알았다. 그럴수록 자신의 존재가 더없이 미워졌다.


 신은 끝내 어머니의 바램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기도하는 사람의 상황을 바꿔주었고, 홍남이에게 자식대신 자식보다 더 든든할 다른 것을 주었다.


 그날도 남편은 천장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응’‘응’하는 소리를 내며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집안일을 도와주러 사람이 오면 그 하루의 1시간 반 정도는 한숨 돌릴 시간이 있었다. 미뤄뒀던 은행일도 보고, 세탁소도 가고 장도 보면 아쉽게도 시간이 빨리 흘렀고 다시 그 아파트 현관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한없이 무겁기도 했다.


 매번 나갈 때마다 복권을 사는 새로운 습관이 들었다. 딱히 큰돈을 바란 것은 아니었고 그저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더 늦추기 위해 저 멀리 언덕길을 올라 멀리 돌아오기 위한 하나의 코스처럼 복권 판매소를 들리는 것뿐이었다. 더운 여름날에도 기꺼이 언덕을 올라 대앵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복권집 문을 밀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와 기분이 좋았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말끔한 인테리어도 좋았고 큰 해바라기 액자가 카운터 앞에 걸려 있어 화려한 생동감도 넘쳤다. 오후 4시에 가면 어르신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신중하게 뭔가를 하고 있는 모습도 재밌었는데 빠르게 6개의 번호를 까맣게 색칠하는 젊은 여성도 자주 만났다.


- 오천 원 자동이요.


- 여기요. 대박 나세요.


  무성의하게 인사하는 여주인을 뒤로하고 숫자를 바라봤다. 3, 8, 19, 20, 28, 32. 매주 보는 숫자였지만 볼 때마다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로또를 사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축복 같은 거였다. 매번 받아 드는 종이에는 이번 주만큼은 당첨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분 좋은 상상이 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아픈 남편도, 매달 이자가 불어나는 병원비도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되든 안 되든 기적을 기대하는 건 인간 믿는 본능 중에서도 제일 순수한 결정체이므로.


 홍남이에게는 역시나 꽝인 날이 대다수였고 혹은 오천 원이나 최고 높게 당첨된 오만 원이 된 적이 끝이었다. 하지만 복권은 일등을 기대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집밖으로 나올 수 있는 매개체로서의 행복이었다. 되고 안 되고는 크게 문제 없었다. 복권을 사러 가는 길이 사계절의 변화를 마음에 담는 유일한 산책이었다. 몇 개의 숫자가 맞고, 틀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랬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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