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 사모님. 오늘 어르신 목욕시키는 날인데 어떻게 할까요? 물 받을까요?
- 아니에요. 조금 있다가 복지관에서 누구 오실 거예요. 그때 같이 할 테니 괜찮아요.
한 달에 한 번. 축 늘어진 사람을 들고 자세를 바꿔가며 목욕시키는 일은 복지관에서 오는 남성 봉사자의 힘으로 이뤄졌다. 다행히 보호자가 옆에 있고 제법 젊은 편이어서 집에 방문하길 꺼려하는 봉사자는 없었고 꽤 규칙적으로 집에 드나드는 사람이 생겨 일이 수월한 편이었다. 아마 남편이 아프지 않았으면 돌봄이 필요한 가정의 속사정을 이렇게 잘 알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 홍남이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시 세팅했고 사회 복지 시스템을 최대한 잘 활용하는 자세를 갖춰나갔다. 최대한 보험금이 빠르게 바닥나지 않도록 신중한 재정 플랜이 중요했다. 개인보험 약관을 살피고 또 살폈다. 지역사회에서 도움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는지 주민센터에 꼬박 들렀다. 전기세와 물세, 난방비와 냉방비도 최대한 아끼고 또 아꼈지만 아픈 환자가 있는 집에서 절약은 한계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후루룩 나가는 돈은 늘 홍남이에게 불안을 가져다줬다. 마트일이라도 해보려 해도 때마다 끼니를 챙기러 집에 들르는 사정을 봐줄 만한 곳은 없었다.
드륵. 문자가 울렸다. 10분 정도 늦는다는 봉사자가 보낸 문자였다. 아래에 어제 온 은행 대출금 상환 문자를 읽다가 지난주에 산 복권이 생각나 휴대폰으로 큐알코드를 찍었다.
“늘 꽝인 줄 알면서도 두근두근하는 마음이 든다니까.” 아주 잠시 심장이 벌렁거리는 마음으로 휴대폰을 바라보다 남편이 끙 소리를 내어 잠시 고개를 돌려 자세를 고쳤다.
그리고 다시 화면에 눈을 응시한 순간. 숨이 컥 막혔다. 들이쉰 숨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점점 몸이 뻣뻣하게 굳어지고 얼굴에 열이 달아올랐다. 귀가 빨개지는 걸 느꼈다.
- 뭐지? 뭐지? 이게 맞나?
- 사모님. 봉사자분 오셨어요.
얼른 휴대폰 화면을 끄고 봉사자와 인사를 했다. 무슨 말을 주고받은 것 같은데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비가 와서 좀 늦었다는 말에 대충 맞장구치며 안부를 묻고 남편을 목욕시켰다. 두 사람의 홍남이가 있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은 여기서 남편의 엉덩이를 들어 비누칠을 하고 있고, 또 다른 홍남이는 계속 그 휴대폰에 적힌 말을 보고 있었다.
1등 당첨을 축하합니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게 정신을 차려보니 홍남이는 남편 옆에 혼자 앉아 있었다. 집안일 도와주시는 분은 반찬 몇 개를 만들어 냉장고에 넣고 가셨고 목욕 봉사자분도 서둘러 다른 집으로 떠난 것 같았다. 분명 셋이서 무슨 말을 주고받았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혹여, 지나가는 말로라도 복권에 당첨됐다고 말했었나? 아니면 두 분은 복권 사본 적 있느냐고 물었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남편을 바라봤다. 그리곤 휴대폰을 켜서 다시 로또 복권 숫자를 맞췄다. 이번엔 숫자 하나하나를 세어가면서 자신이 아까 본 게 꿈인지 아닌지 확인할 시간이었다.
제발 꿈이 아니길.
정확하게 아까 본 문장이 그대로 떴고 홍남이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다가 얼른 끊었다. 침착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이게 정말인지 알아야 했다. 인터넷 창을 열고 ‘로또 수령 방법’을 검색했다. 은행 본점에 가야 한다, 월요일에 가면 너무 많이 기다린다, 수상하게 가지 말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라는 여러 지침들을 적어 놨다. 이걸 쓴 사람들은 한 번이라도 당첨되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인지 궁금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큰돈이 그것도 공짜로 생기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앞으로 어떤 무시무시한 일들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갑자기 큰 병에 걸려 아픈 남편을 두고 죽어야 한다면? 어머니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큰 행운을 앞에 두고 홍남이는 안 좋은 상황들만 머릿속에 나열하고 있었다. 마치 바다처럼 넓고 깊은 행운에 스포이드로 불행을 넣어 희석시키는 것처럼.
자신의 몫이 아닌 이 행운을 감히 받아도 되려면 일상의 평온을 저당 잡혀야 하는 운명에 걸려든 것 같았다. 온갖 불행을 싹싹 긁어모아 당장 내일 일어날 것처럼 생각해야만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는 것이었다.
현재 시간은 오후 10시 28분. 오늘은 수요일.
내일은 집안일을 봐주시는 분이 오지 않는 날이기 때문에 옴짝달싹 움직일 수 없었다.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냉정한 마음과 계획이 필요했다. 일단 이 사실을 누구에게 알릴 것인가. 아니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 것인가. 갑작스레 큰돈이 생기면 당장 생활이 달라질 텐데 이걸 어떻게 숨길 것인지 고민됐다. 일단 막내 동생에게는 절대로 티 내면 안 된다.
제일 먼저 대출금을 갚고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싶었다. 작은 마당이 있어 조금이라도 숨 좀 트일 곳이 있었으면 했고 잔뜩 책을 쌓아두고 딱 하루 한 시간만 제 방에 틀어박혀 읽고 싶었다. 가능한 남편이 누워 있는 방에서 가장 멀리 있는 곳에서 여름에는 에어컨도 시원하게 틀고, 겨울에는 이불속에서 수면양말 좀 벗었으면 싶었다.
살고 싶은 집을 상상하니 이제야 조금씩 당첨 액수가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오늘 벌어진 일이 사실인 듯싶었고,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도 감이 잡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야지. 남편에게도. 어머니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