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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Oct 20. 2024

비밀스러운 열정

08

 -언니, 내일 쉬는 날이죠? 시간 괜찮으면 저 좀 도와주실래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서로 약속도 하지 않은 채 점심시간에 만나 회사 빌딩에서 멀리 떨어진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책을 챙기며 일어나는 홍남이에게 물었다.


- 순애씨 무슨 일 있어요?

의아한 듯 쳐다보며 시간을 보니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으면 반장 언니에게 한 소리 들을 것이 뻔했다. 서둘러 자리를 치우면서 흘낏 순애씨 표정을 봤을 때 난감한 눈빛이 스쳤다.


- 그건 아닌데 저랑 어디 좀 같이 가주셨으면 해서요. 딸애가 남자친구 소개해 준다고 같이 밥 먹자는데 마땅히 입고 갈 옷이 있어야 말이죠. 옷장 열어보니 죄다 칙칙하고 시장에서 산 꽃무늬 조끼 아니면 분홍색 카라티 밖에 없어서 언니한테 옷 좀 봐달라고요. 잘은 모르겠는데 언니 입은 스타일만 따라 해도 좀 세련돼 보일 것 같아서요.


 살다 보니 자신에게 옷을 봐달란 사람이 다 있나 싶어 순간 웃음이 났다. 물론 홍남이에게 옷은 남들과는 다른 의미를 지녀오고 있었다.


 결혼 전에는 나름 패션에 관심이 많아서 여은정과 잡지를 사보고 서로 옷을 빌려 입어가며 동네 번화가를 놀러 다니기도 했고, 결혼 후에도 나름 깨끗하고 소재가 좋은 옷 몇 벌을 골라 오래도록 입곤 했다. 그러다 남편이 쓰러지고 혼자 그를 씻기고 입히고, 뉘이고 먹이며 힘을 써야 해서 검정 운동복 티셔츠와 바지로 자신의 색을 점차 지워나갔다. 꼬박 6년을 그렇게 살면서 거울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쓰러진 남편이 상체만 일으킬 수 있기를 바라다가, 고개만 돌릴 수 있기를 희망하다 그에게서 아무런 기대와 미래가 보이지 않을 즈음 푸석한 머리, 축 처진 얼굴, 굽은 등과 어깨만 남아 삶의 의지가 바닥났을 시간. 여은정이 홍남이를 다시 일으킨 것이 바로 옷부터였다.


 돌처럼 굳어가는 친구를 더 이상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던 여은정은 홍남이를 붙잡고 백화점부터 달려갔다. 화사하고 밝은 옷 몇 벌과 스킨 기초 세트와 선크림, 투명하게 발리는 립밤 하나를 사서 친구에게 안겼다. 그리고는 평소와 다른 어조로 친구에게 부탁했다. 이제는 너의 인생도 함께 챙기라고. 그동안 부부의 의무감과 죄책감으로 너를 다 갈아 지운 채 살아왔다면 그 시간은 6년으로 충분히 만회했으니 앞으로 남은 부부의 삶에서 너를 떼내어 화초 키우듯 돌보라고. 매섭게 들리겠지만 형준 씨의 미래는 점쟁이가 아니어도 다 아는 사실 아니겠냐며, 끝을 향해 같이 걷지 말고 너의 길을 새롭게 가는데 주저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홍남이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긴 한숨이 나왔다. 그 숨은 몇 년 동안 제대로 뱉어내지 못하고 남들이 수고하고 애쓴다는 가엾은 칭찬과 대단하단 눈빛에 묻혀 스스로 만든 책무감에 짓눌려 온 길고 긴 숨이었다. 절대 밖으로 내서는 안 되고 꽁꽁 숨기고 숨기다 막막한 현실에 눈물이 날 때마다 같이 삼키던 숨이었다. 당장 친정어머니도 박서방이 혼자 있다가 어떻게 될까 일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으며, 아픈 남편 간병 드는 일이 지금 홍남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역할이자 당연한 일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곳에서 홍남이는 감히 혼자 행복하고, 웃고, 즐거운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죄처럼 느껴졌으며, 그 죄는 스스로에게 내리는 벌로 추레하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갖추는 꼴로 나타났다.


 친구와 만난 그날을 계기로 홍남이의 마음은 부부에 대한 의리와 의무감, 죄책감 같은 감정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졌다. 남들 눈을 지극히 의식해서 살아왔던 삶이 조금은 옅어졌고 여은정이 사다 준 옷을 골라 입고 생활하는 날들이 생겼다. 비록 집 안에만 있다고 해도 밝고 따뜻한 색의 니트와 바지가 주는 소재의 편안함과 안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고 귀찮다고 한쪽으로 묶고만 있었던 머리도 짧게 단발로 잘라 스타일링을 하니 즉각적인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됐다. 누워 있는 남편만 보던 하루에 틈틈이 거울을 보며 자신의 안색을 살펴내는 수고스러움이 점점 길들여질수록 은연히 삶의 의지 같은 것들이 마음속에서 피어났다. 조그마한 식물 몇 개를 사서 거실에 들여놓았고 칙칙한 황금색의 무거운 커튼을 떼어내고 시원한 블루 스프라이트가 수 놓인 커튼을 바꿔 달았다. 귀찮아서 대충 먹었던 인스턴트 주먹밥 대신 직접 만든 카레와 김밥들을 챙겨 먹기 시작했다. 마치 남편이 건강하게 일어나 함께 살림을 꾸리고 사는 것처럼 사는 게 그녀의 인생 2막 시작이었다.



 

순애씨는 동백꽃을 닮은 진한 빨간색 등산복 상의를 입고 그 위엔 보라색 재킷을 걸쳤다. 나름 백화점 나온다고 신경 써서 온 차림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눈에 말간 반달이 걸려 있었다.


- 이런 데 좀 비싸겠죠? 사실 그냥 있는 거 입고 만나도 상관은 없는데 딸애가 소개해 주는 첫 남자친구이기도 하고 또 잘하면 사위가 될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 집이 없는 집구석인 건 맞지만 보이는 거라도 좀 있어 보이면 딸애도 기 안 죽고 저도 좀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요.


- 알아요. 그 마음. 사람들이 보이는 게 뭐가 중요하냐 속이 중요하지라고 말해도 다들 눈에 보이는 것들로 판단하고 경계하고 구분 짓는 거. 지긋지긋해도 어쩔 수 없죠. 나부터도 그런 걸. 우리 이왕 나온 김에 순애씨한테 잘 어울리는 것 찾아 입어 봅시다.


 여은정이 그랬던 것처럼 홍남이도 순애씨에게 밝고 단정한 색의 블라우스와 소재가 고급스러운 긴치마를 추천했다. 알록달록 등산복에 가려진 순애씨의 진짜 얼굴은 차분한 베이지를 잘 받아들여 따로 뭘 하지 않아도 근사한 사모님처럼 보였다. 몇 가지의 스카프를 두르고 구두까지 신고 나서야 자신도 그런 모습을 처음 보았는지 몇 분 동안 우두커니 서 있는 순애씨의 굽은 등에 예전의 자기 모습이 겹쳐 보였다. 가격표를 보고 반달눈이 땡그란 보름달처럼 커졌지만 이내 뭔가 결정한 듯 그 모든 걸 산 순애씨였다.


- 이거 다 안 사도 돼요. 내 생각엔 블라우스랑 치마만 사도 충분할 것 같은데..


- 언니. 저 아까 거울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저는 여태 살면서 한 번도 이런 옷 입어본 적도, 아니 이런 걸 입어보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살아온 내가 참 병신이었구나 싶더라고요. 뭘 얼마나 잘 산다고 나한테 어울리는 것, 안 어울리는 것 알아볼 생각도 안 하면서 살아온 걸까요? 먹고사는 게 힘들었다고 해도 비싼 소고기만 먹으면서 산 것도 아닌데요. 뭐가 바쁘고 어렵다고 나한테 이런 옷 하나 못 입히며 산 건지.. 나도 이런 옷 입으면 이렇게 이뻐질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더 어리고 예쁠 때 입었더라면,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분명하게 아는 사람이었더라면 제가 지금 남의 사무실 청소나 하며 살았을까요?


 갑자기 복받쳐 오르는 그녀의 모든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살다 보면 뜻밖의 상황에서 자신의 지난 청춘과 젊음이 안쓰러워 보일 때가 있다. 지금 나의 삶이 특별히 불행하거나 안 좋은 것도 아닌데 무언가가 트리거가 되어 지금껏 살아왔던 나의 인생을 모조리 뒤바꾸고 싶은 강렬한 마음. 아마 순애씨에겐 오늘이 그날인 것 같았다. 시가 그녀의 오십여 년 동안 지탱해 온 울퉁불퉁했던 현실을 아름답고 다르게 보여준 것이었다면, 오늘 본 거울 속 그녀의 모습은 그 오십여 년이 한꺼번에 부정당한 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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