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여은정은 오랜만에 취기가 잔뜩 오른 채로 물끄러미 자신의 친구 얼굴을 살폈다. 맨 처음 일하러 나간다고 했을 땐 얼마나 상실감이 크면 그 많은 돈을 두고 생전 해보지도 않은 청소일을 한다고 했을까 걱정하던 차였다. 며칠 뒤면 몸 아프다고 금방 드러누울 줄 알았던 친구는 몇 달을 꼬박 성실하게 다녔고 그 안에서 아는 얼굴도 만들어 새장에 갇힌 새에서 이제 좀 밖으로 날아다니는 아기새가 된 듯 보였다.
아무리 친구여도 여은정은 홍남이를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여중생, 여고생 시절에도 둘은 단짝이라 서로의 가정사와 연애사, 못난 자아감까지 모두 다 알았고 각자 결혼생활을 유지할 때도 본인은 짧았을지언정 남편의 병간호를 10년이나 아무 말 없이 해낸 친구가 부러웠다.
그랬다. 대견하고 장한 것과는 다른 결의 감정. 그건 배우자하고만 가질 수 있던 유대감을 너무도 일찍 상실한 여은정에게는 없는. 부부간의 애정과 의리에서 오는 부러움이었다.
-얘. 은정아. 너 술 좀 천천히 먹어. 갑자기 왜 이렇게 폭주를 하고 그래.
- 놔둬봐. 기분 좋아서 그런다. 아니 이 큰 집에 꼴랑 두 사람 들어왔다고 이렇게 더운 것좀 봐. 맨날 나 혼자 있으면 아무리 보일러를 틀어도 추운데 말이야.
- 아드님은 유학하신다더니. 한국에 잘 못 오시죠?
-걔요? 아마 지 어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도 없을 걸요? 아. 통장 보면 알겠네요. 그 달에 돈이 들어왔나 안 들어왔나 보면 내 생사 알 수 있겠지.
- 어머. 얘가 별소리를 다해. 아니에요. 작가님. 은정이 아들 아주 잘 지내고 연락도 잘해요. 나한테까지 신경 쓰는 거 보면 아주 반듯하게 잘 자랐어요.
아들은 여은정에게 아프고 슬픈 손가락이었다. 하필 전남편과 얼굴이 너무도 빼닮아 볼 때마다 가슴이 시큰거리고 아린 아이긴 하지만 이 세상 그 무엇을 준다고 해도 절대 바꿀 수 없는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아들이었다. 유명 배우는 아니어도 자신의 이혼으로 아이가 친구들 사이에서 놀림을 당하거나 불이익을 받을까 얼른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 돈을 마련하는 일도, 아버지의 흔적을 지우는 일 모두 여은정이 감내해야 하는 일이어서 죽기 살기로 아이를 키우기 위해 불륜녀든 가정부든 그 어떤 역할도 해내던 그녀였다.
- 그때 남이가 날 많이 챙겨줬어요. 매일 우리 집에 와서 우는 내 옆에 있으면서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다 해줬죠. 내가 우리 부모님 가슴에 대못 박고 밀어붙인 결혼이라 찾아뵐 수도 없었어요. 이 세상에 딱 둘, 아들이랑 나만 남았는데 그 아들마저 멀리 보내고 나서 진짜 혼자 막막했을 때 남이가 늘 와줬어요. 지하철 타고 2시간씩 오가는 거리를 말이에요.
김작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으며 둘의 관계를 상상해 보았다. 아주 잘 녹이면 좋은 단편 드라마 한 꼭지 정도는 쓸 수 있을 듯도 싶었다. 요즘은 사람들의 어떤 이야기만 들어도 어떻게 에피소드로 각색할 수 있을까 혼자 개요를 짜보는 버릇이 생겼다. 원래 하고 싶었던 시나리오 작가의 꿈을 아직 놓지 못한 채 예능작가 팀에서 2년째 박봉으로 살림을 꾸리고 있던 터라 초조하고 불안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어떻게든 빨리 예능작가를 벗어나 자신의 시나리오로 근사한 드라마 하나를 제작하고 싶었다.
-선생님 요즘 인기 많으신 건 알고 계시죠? 그래서 예전에 결혼하셨던 부분도 루머로 많이 돌곤 하던데.. 유부남과 결혼하셨다는 소문도 있고..
- 하 참. 별 얘기가 다 도네요. 내가 유부남이랑 결혼했으면 그동안 모은 돈 다 주고 떠났을까 봐? 악착같이 한 푼이라도 더 뺏어먹고 튀지.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나한테 없는 낭만과 예술을 동경하던 남자. 결국 이상의 날개처럼 되어버렸지만.
홍남이는 이상의 날개란 말이 슬프게 들렸다. 자신에게 그 사람을 처음 소개해 주었을 땐 아주 근사하고 멋진 남자여서 친구의 맑고 해사한 웃음을 처음 가져다준 사람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자신과 있을 땐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친구의 수줍음과 새침함을 기꺼이 사랑하고 지켜줄 수 있는 남자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 후 그 남자는 사랑의 낭만과 결핍을 골고루 갖다 쓰면서 현실에 적응하지 못했다. 더 높이 날고 싶어 했고 멀리 도망치고 싶어 했으며, 다시 잡아주길 투정 부렸다. 아마 아이만 없었더라면 여은정은 그 자유로움에 기꺼이 참여했을 것이다. 애초 그 예고 없는 분방함을 사랑했으니까. 하지만 모성은 바람이 잠잠해지길 원했고, 그의 발이 단단히 땅에 뿌리내리기를 바랐다.
예측이 안 되던 사랑에서 이제는 예측 가능한 사람으로 변하길 바란 그녀가 나쁜 사람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얼른 글이 쓰고 싶었다. 이상의 날개를 꺾어버린 여자의 모습과 꺾인 날개로 그림자를 짙게 드리워가며 땅을 걷는 한 남성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몇 주 동안 어떤 글감도 떠오르지 않아 애를 먹었던 시간이 모조리 풀리는 순간이었다. 책상에 앉아 여기저기 섭외 전화를 돌렸던 지난날이 보상받는 기분. 얼른 휴대폰 메모장을 열어 몇 가지 스토리를 짠 다음 캐릭터의 성격과 분위기, 몇 장면의 대사를 써내려 갔다.
시작은 우연을 동반해 온다.
매일 마감에 쫓겨 닳을 대로 닳은 영혼을 다시 일으켜지 못하고 매번 노트북 워드프로그램 창을 덮은 밤. 자괴감에 잠 못 이루는 일들이 많았다. 언제까지고 여기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다음 달 월세와 휴대폰비, 각종 보험과 공과금을 납부해야 하는 날이 오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이곳에 남아 이 여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모처럼 이뤄진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