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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이야. 너 나랑 tv 출연 좀 하자. 아는 작가가 아침방송에서 일상 좀 찍어달래. 갱년기 여성한테 좋은 제품이 협찬으로 들어왔나 봐. 나랑 아주 맛있게 그거 따라 마시면 된단다.
다짜고짜 여은정은 전화로 갱년기를 운운하며 홍남이를 설득했다.
- 내가 무슨 방송이야. 부끄럽게. 난 못해. 다른 사람 찾아봐. 너 친한 연예인들 많잖아. 그분들 초대해서 하면 방송이 더 잘 나오지. 나는 말도 잘 못하고 괜히 민폐야.
- 그냥 웃고만 있으면 돼. 나랑 제일 친한 친구가 너고, 또 내가 일 없을 때 하는 게 너랑 노는 건데 뭐. 그리고 그 좋단 영양제를 왜 다른 사람이랑 먹냐? 콩알 한쪽을 떼어먹어도 너랑 나눠야지.
여은정은 의리 빼면 시체인 사람. 이 세상에 가장 소중한 건 아들 그다음으로 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 의리 때문에 죽고 못 사는 날도 많았지만 어쨌든 그 의리로 악착같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중년 탤런트가 바로 여은정이었다.
- 저 진짜 말을 잘 못해서 그러는데 그냥 가만히 앉아서 웃고만 있어도 되는 거죠? 진짜 방송 같은데 안 나오고 싶었는데 은정이가 너무 몰아붙여서 할 수 없이 왔어요. 편집 좀 잘해주세요. 작가님.
-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일상 모습 스케치로 짤막하게 들어가고 대부분은 은정 선생님이 스튜디오에 나와서 얘기하실 거니까 여기서는 이것만 잘 드셔 주시면 돼요. 예쁘게 잘 담아 드릴게요.
웃을 때마다 콧등에 잔주름이 가지런히 잡히는 작가는 세심하게 ppl 제품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진열하고 여은정과 홍남이가 잘 마실 수 있도록 시범을 보였다. 다들 노력하고 바쁘게 촬영 준비를 하고 있어 홍남이도 더 이상 거절은 할 수 없었고 이왕에 온 고 회색 티셔츠를 입은 등이 땀으로 젖을 정도로 긴장하며 촬영을 끝냈다.
-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 어떻게 선생님은 날이 갈수록 더 고와지시는 거예요? 젊으셨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좋아 보이세요.
김작가는 이번 프로그램 편성에 여은정을 다루자고 적극적으로 밀었다. 이달의 핫이슈 인물을 섭외해 일상적인 생활에서 ppl 제품을 자연스럽게 넣고 몇몇 인터뷰 형식을 브이로그처럼 찍어 방송을 내보내는 프로그램인데 요즘 sns 채널 피드에 심심치 않게 보이는 연예인이 바로 여은정이었다. 소위 엠지 세대들 사이에서 여은정이 출연했던 드라마가 역주행 중이었고 그때보다 지금 훨씬 젊어지고 세련되어 보인다고 젊은 여성들이 패션을 따라 하는 밈 영상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20년 전 여은정의 모습은 기 세고 촌스럽고 아줌마 중에서도 억척스러운 눈썹을 씰룩거리며 입에 걸레를 문 듯 거친 말로 대사를 맛깔나게 읊었던 연기자였는데 지금 나오는 드라마에서는 어딘가 한층 정돈되고 깔끔해진 모습으로 온화하고 우아한 이미지마저 연출하고 있었다. 엠지 세대들은 적극적으로 자신들끼리 피부가 달라졌다, 스타일리스트가 정신 차렸다, 돈을 많이 벌었다, 성형으로 다 갈아치웠다 등등 온갖 말로 그녀의 변신 이유를 추궁했고 김작가는 이런 궁금증을 풀어주면서 유튜브 쇼츠의 조회수를 올려보겠노라 의지를 태우며 여은정을 카메라 앞에 세웠다.
- 글쎄요. 내가 예전하고 많이 달라지긴 했죠? 사람들은 뭐 티 안 나게 고쳤다느니 돈 많이 벌어 당연하다느니 하는데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철저히 내가 노력한 덕분이에요.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요? 살 빼고 싶으면 안 먹고 운동하는 게 당연하고, 이뻐지려면 얼굴에 바른 화장품이라도 꼼꼼하게 닦아야지. 안 그래요?
- 선생님 말씀이 맞네요. 제가 너무 당연한 걸 물어봤나 봐요. 민망할 정도로 팩트만 얘기해 주시는데요?
- 내 말투가 살짝 까칠했나? 미안 작가님. 나 아직도 멀었어요. 예전부터 받은 조연 설움 아직까지 못 풀고 사람 좋은 척하는데 꼭 정곡을 찔리면 나도 모르게 가시를 세운다니까요. 사실 내가 좋게 변한 건 다 옆에 이 친구 덕이예요. 얘가 옆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도 잔소리를 해 싸니까 남편 없는 내가 얘 말이라도 들어야 인간 되겠다 싶어 많이 배워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여은정 옆에 서 있는 홍남이는 작가가 보기엔 한없이 야리야리하고 조용한 성품의 고운 아주머니처럼 보일 뿐이었다. 맨 처음에는 주변에 같이 일하는 중년 여성 탤런트를 한 프레임에 담고 싶어 몇몇을 추천해 보았지만 여은정은 기어코 일반인 친구를 출연시켰다. 방송 제작 과정을 모르는 일반인은 제품을 ppl 하기도 어색하고 포인트를 잘못 짚기 때문에 촬영 시간이 길어지기 일쑤여서 이왕이면 척하면 척 빠르고 효율적으로 장면을 담을 수 있는 연예인이길 바랐는데 의외로 일반인 친구에게서 깔끔하게 떨어지는 우아함과 고운 생기가 묻어나서 이번 방송 컨셉에 잘 어울렸고 트렌드에 민감한 중년 여성들이 가장 쉽고 크게 돈 쓸 수 있는 영양제 제품의 홍보에도 도움이 된 것 같아 김작가는 이번 촬영이 꽤 만족스러웠다. 편집만 잘해서 내보내면 이번 기획을 토대로 월급을 올리거나 일하는 시간에 대해 어느 정도 타협점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부푼 기대가 차올랐다.
- 얘가 별소리를 다하네. 네가 잘해서 그렇지 내가 뭘 도와줬다고 그런 말씀을 드려.
- 봤죠? 얘가 이렇다니까. 사람 칭찬 잘하고 기분 좋게 만드는 게 얘 특기예요. 내가 요즘 좀 차분하고 잘 사는 사모님처럼 보였다면 이 친구 보면서 많이 따라한 것도 있을걸요? 얘는 어릴 때부터 지가 입던 옷 꼭 다림질하고 다니면서 부지런했어요. 겉으로는 유약해 보여도 속은 꽤 단단해서 뭐에 실망하고 풀 죽어도 또 곧잘 일어나서 회복한다니까. 강단 있는 친구가 옆에 있으니 알게 모르게 배우고 따라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옛말에 친구를 잘 사귀란 말이 있나 봐. 뭐 요즘 말로는 끼리끼리가 사이언스라고 후배들이 말하던데요?
- 선생님 말씀 들으니 친구님 너무 궁금해요. 일하신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 하세요?
속으로 뜨끔한 홍남이었다. 빌딩 청소를 하면서 단연코 창피하거나 부끄러운 일 없이 열심히 해왔는데 가른 사람이 이렇게 대놓고 물어본 적이 처음이어서 차마 입에서 청소일 한다는 말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슬쩍 여은정의 표정을 보다가 민망하고 어색한 표정으로 작은 빌딩에서 청소하는 일을 한다고 속삭이듯 말했다.
- 자자 우리 이러지 말고 작가님 시간 비면 술이나 한 잔 하고 갈래요?
김작가는 다른 촬영지를 알아보러 움직여야 했지만 여은정의 얘기에 머뭇거렸다. 몇 달 동안 왕작가에게 불합리한 업무지시를 들어왔던 터라 마음속에서 불만이 터지고 있었고 그래서 일을 그만둬야 하는지 고민이 많던 차에 촬영섭외고 뭐고 오늘 하루 정도는 땡땡이를 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촬영도 잘 끝났고 시청률도 좋을 거란 기대에 살짝 흥분되어 있던 상태이기도 했다. 왕작가에겐 거짓말로 오늘 몸이 안 좋아 집에 들어가서 마무리하겠다는 짤막한 문자를 남기고 배달 어플로 매운 냉면과 수육을 주문했다.
얼떨결에 그 자리에 함께 머무르게 된 홍남이는 계속 시간을 확인하며 언제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지 눈치를 살폈다. 내일 새벽에 일어나려면 얼른 집에 가서 씻고 간단한 카레를 해 먹고 책을 읽으며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해야 했는데 예상하지 못한 자리에 피로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오랜만에 친구의 생기 있는 표정을 보니 혼자 집에 가야 한다고 매정하게 돌아서기도 미안해서 있는 재료로 국 하나와 안주 하나를 만들어 소주잔에 술을 따랐다.
- 짠. 나는 와인파. 작가님은 맥주파. 남이는 소주파. 각 주종이 다 모였네요. 완벽한 술꾼들의 모임 같은걸요?
매일 썰렁하게 비어있던 집에 사람들이 있으니 훈훈해 기분이 좋아진 여은정은 술잔을 계속 부딪치며 웃었다. 술은 각자 알아서 마시자고 신신당부했던 말은 어디로 보내고 한 잔 한 잔 빠르게 비워내며 웃고 또 웃더니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아직 술기운이 약하게 세 사람 사이를 안개처럼 머무르고 있었을 뿐인데도 여은정은 오랜만에 울어본다며 슬며시 미소 짓기도 했다.
- 친구분은 계속 시계 보시네요? 가셔야 하는 거예요?
- 아. 제가 새벽에 일어나야 해서 계속 초조해지네요.
- 남이야. 그냥 우리 집에서 자고 바로 출근해. 뭘 꼭 집에 가려고 해. 서운하다 야. 서방도 없는 쓸쓸한 집에 뭐 볼 게 있다고 그렇게 기를 쓰고 가려고 하냐? 얘가 꼬박 남편 병수발 10년 하고 이제 서방 보낸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런데도 저렇게 의연하고 담담하다니까. 나는 이혼하고 3년 동안은 울고 불고 미치고 별 쇼를 다했구만.
- 어머 정말요? 그런 사연 있는 줄 몰랐어요. 모습이 너무 고우셔서 청소하신다고 해서 좀 놀랐었는데.. 또 그런 히스토리가 있으셨네요.
끄억. 길게 트림을 내뱉으며 담배 하나 문 여은정은 흐뭇한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 쟤가 의외로 저 일을 오래 하더라고요. 나는 한 달 정도 하면 아프다 하면서 그만둘 줄 알았더니. 역시 애가 강단이 있어요. 그동안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알뜰살뜰 먹고살다가 병으로 남편 누우면서 그동안 모아둔 돈 야금야금 빼먹으며 살더니 이젠 혼자돼서 밥벌이한다고 나름 홀로서기 중이에요.
여은정의 말을 들으며 홍남이는 가슴 언저리가 답답해져 왔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들으면 꼭 나타나는 징조였다. 친정어머니와 동생의 입에서도 비슷한 말들이 나오면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삶의 모양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여러 선형을 그렸다. 친정어머니의 입에선 불쌍하고 슬픈 생을 띠었고, 동생 입에선 보험금으로 노후가 준비된 생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친구의 입에선 그저 어린아이가 대단한 어른이라도 된 것처럼 자부심의 형태로 보였다. 그러나 정작 홍남이가 생각한 스스로의 삶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고단한 하루의 현실과 바라는 하루의 상상을 묘하게 섞어가며 남은 삶을 소멸시키는 과정이었다.
소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날 하루 잘 살지 못했어도 그럭저럭 위안이 됐고, 또 잘 살았다한들 더는 욕심부리지 않고 때마다 충실할 수 있었다. 버티는 것만이 전부였던 시절. 남편의 간병과 집안의 자질구레한 모든 일을 끝내고 조용한 밤에 누우면 저절로 오늘 시간도 잘 소멸시켰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내일의 행성에서 또 하루살이처럼 열심히 살아내보잔 마음이 생겼다. 운명을 다한 소행성이 먼 곳에서 죽을 때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는 것처럼 홍남이의 하루하루 소멸하는 행성도 그녀의 부침과 노력 그리고 의지로 만들어진 빛으로 곧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