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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Dec 01. 2024

비밀스러운 열정

11화

- 나가서 술 좀 더 사 올게요.

- 같이 가요. 작가님. 여기 골목골목길 어두워서 아가씨 혼자 내보내기 무서워요.


여은정은 추가 안주를 만들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가 창문을 열어 차가운 밤공기를 안으로 들였고 홍남이와 박작가는 함께 자리를 일어섰다.


 금방 겨울이 올 듯한 제법 쌀쌀해진 공기가 둘 사이를 에워싸는 동시에 밝고 밝은 달빛 아래,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의 어색함은 떨치고 술기운을 빌려 서로의 안부를 재차 묻고 또 묻게 된 밤. 홍남이는 실로 오랜만에 사람다운 대화를 나눴단 생각이 들었고, 박작가는 이질적인 하루를 보내고 있는 지금이 꿈같았다.


- 앞으로 우리 은정이 좀 잘 써주세요. 제 친구여서 그런 건 아니지만 참 외로움을 잘 타는 아이예요. 저도 똑같아서 둘이서 죽이 잘 맞기도 하지만 이쪽 세계가 워낙 쌀쌀하고 차갑다고 들었어요. 작가님처럼 능력 좋은 분 알고 있으면 좀 낫겠죠.


 고작 서른둘밖에 안 된 자신에게 친구의 안녕을 당부하는 환갑 넘은 홍남이를 보면서 과연 내 주변엔 이런 친구가 있을까 생각해 보는 박작가였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며 학창 시절 친구들하고도 연락을 끊다시피 하면서 글 쓰는 일에 몰두한 시간이었다. 아카데미를 다니고 작가 교실을 찾아다니면서 어렵게 작은 스튜디오에 입사해 막내 작가부터 시작한 이 일은 어쩐지 하면 할수록 자신이 염원하던 꿈과 멀어졌고 지금은 쉽게 발을 떼고 싶어도 녹록지 않은 현실 덕분에 뺐던 발을 스스로 다시 집어넣는 상황에 이르렀다. 처음부터 사람으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나는 드라마를 쓰고 싶었지만 아직까지도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대신 세상을 시끄럽게 물들이고 있는 사람을 섭외해 그들을 더욱 크고 화려하게 포장하는 기술로 더 인기 많은 연예인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괴리감은 오랜 시간 박작가를 짓눌렀고 어느 순간 그 무게가 더 이상 무겁지 않도록 된 시간이 무섭던 차였다.


- 남이 님은 혼자 사는 거 익숙해지셨어요? 저는 작가 한다고 스무 살에 처음 서울로 와서 가족들하고 떨어져 사는데 20대 때는 되게 좋았는데 이제는 싫더라고요. 일할수록 함께 있어도 혼자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많아서 그런지 집에서까지 혼자 있으면 쓸쓸하고 외로워요.


 오늘 선뜻 박작가가 이 자리에 남게 된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소 섭외를 가고 사무실에 들렀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새벽이 꽤나 쓸쓸해진 건 오래되었고 그 마음이 어떤 날엔 사무치게 아프고 슬프기도 했다. 매일 밤을 새우는 사무실도 싫었지만 텅 빈 방에 들어가는 월세집에도 정들지 못했다.


- 저는 삼 남매여서 결혼이 너무 하고 싶었어요.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대식구가 함께 살아서 제 방 하나 가져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남편하고 살 때 너무 좋았어요. 내 방도 있고 작지만 거실도 있고 혼자 조용히 귤 까먹을 수 있는 부엌도 있고요. 그런데 오랜 시간 아이 없이 둘만 사니까 살짝 그리웠던 것도 같아요. 북적북적하게 살았던 추억이 실은 좋았던 거였어요. 너무 좋고 행복해서 몰랐던 시절이었죠. 그러다 남편이 아프고 또 십 년은 함께 있어도 혼자인 상태로 살다가 지금은 아예 혼자가 되어보니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래요. 나쁘지는 않아요. 물론 좋지도 않고요.


 대화를 나누며 점점 술기운이 피부 속 혈관에 피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동안 꽁꽁 감추고 있던 모든 감정과 생각이 멀리 흐트러지는 게 보였다. 홍남이는 남편을 보내고 일을 시작하고 그것에 최선을 다한 오늘의 순간까지 마음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지내왔다. 홀가분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날까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고 그것을 눈치챌 가족들의 시선이 무서웠다. 그래도 쓸쓸해진 하루들이 다시 반짝이길 바라며 열심히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은. 어둑어둑한 밤 자신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누군가와 속 깊은 이야기를 끝없이 그리고 아주 솔직하게 나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별, 아니 사별이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렸을 때 얼마나 무서웠고 두려웠는지. 생생하고 펄떡 뛰던 감정이 시간이 흘러 딱딱하게 변해 얼마나 털어버리고 싶었는지. 하지만 결국 그 시간을 다시 소중하게 품 안으로 끌어왔는지까지. 쌀쌀한 밤공기에 한껏 쪼그라든 피가 녹아내릴 때까지 말하고 또 말하고 싶었다.


- 사실 은정 선생님이 남이 님이랑 방송한다고 하셨을 때 엄청 걱정했어요. 말리기도 했고요. 아무래도 일반인이셔서 이슈 되는 부분이 없으면 저희 입장에선 좀 그렇거든요. 근데요. 사실 제가 이런 게 너무 싫었거든요? 왕작가가 매일 시청률이 낮다, 이슈 좀 끌어와라, 뭣 좀 만들어보라고 말할 때마다 속으로 얼마나 치를 떨었는지 몰라요. 근데 이젠 제가 그 말을 듣기도 전에 벌써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을 똑 닮아가고 있어요. 저는 다를 줄 알았는데 결국 똑같은 그 밥에 그 나물이었던 거죠.


 자신에게 실망하는 일에는 얼마나 많은 방법이 있는 걸까? 드라마 공모전에 열 번 떨어지고 난 것보다 자신이 선배를 닮아가고 있단 사실을 마주쳤을 때 든 실망감은 박작가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당신과는 절대 다른 길로 가서 보란 듯이 성공할 거라고 코웃음 치던 박작가의 내면에 벌써 들어앉은 왕작가의 모습은 그녀가 묵인해 오던 그 자신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에게 느끼는 실망의 큰 죄였다.


 씁쓸하게 이야기를 하는 박작가를 보며 홍남이는 무어라 말하기 어려웠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에게 실망을 한다. 공부를 못해도 실망하고 남자친구와 헤어져도 다 제 탓인 것만 같은 것들로. 그 실망감은 필연적이고 운명적이어서 어떻게든 끌어안고 잘 달래어 갈 수밖에 없다. 이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릴 순 있지만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실망감이 들어 슬퍼할 순 있어도 전부로 여겨서는 곤란하다. 불안이나 걱정 같은 감정과는 달리 실망을 자꾸 자신에게 겨누면 절망으로 퍼진다. 절망은 희망을 눈먼 기적으로 만들고 유한한 인생의 가능성을 놓쳐 버리게 만드니까.


 홍남이는 소주와 맥주가 든 봉지를 흔들며 걷는 박작가의 굽은 등을 바라보며 그 실망감이 그녀의 인생에서 무심히 지나쳐 가버리길 바랐다. 그런 실망감쯤은 언제든지 오고 또 언제든지 가버린다.


그리고는 그 무심함이 그녀의 인생에도 조용히 깃들기를 바라며 추운 공기에 입김을 후 하고 불어 담배에 불을 붙여 깊게 빨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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