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책 Oct 24. 2021

되는 대로, 목적없이

달려라, 산책



친구 1.


친구일까, 지인일까. 나는 그를 친구라 지칭하고 그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아는 사람, 이라고 하기에 그는 나에게 따뜻한 정을 베풀었고 그것은 언 손에 쥐어 준 장갑, 혹은 더운 여름 탈수 직전에 꺼내 준 차가운 보리차 같은 것이어서 단순히 아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나를 어떻게 부르든, 나는 그를 친구라 한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블로그를 통해서였다. 같은 해에 태어난 아이를 키우는 나와 나이가 같은 사람, 게다가 적은 수의 조그마한 살림들은 소꿉놀이 같으면서도 어찌나 단정한지. 사진 몇 장에 나는 그의 이웃이 되었고 그의 하루를, 그의 일기를 읽었다. 그러다 그도 나처럼 시댁 살이를 하다 몇 년 후 분가를 하게 되면서 나 역시 뭔가를 희망하게 됐다. 우리도 분가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희망.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말을 꺼내본 적도 없는 그 두 글자. 깊고도 지난한 갈등이 있었으나 결국 우리는 분가를 했고, 그는 나에게 광화문에서 만나자고 했다.


광화문 스타벅스에서 만나 정동길을 걸어 르풀에서 밥을 먹었던 그 여름. 그는 나의 신음과 우울을 알고 이해하는 몇 안되는 이 중 하나였다. 맞아요, 그게 딱히 어렵게 하는 어른이 아니어도 어려워요. 곰처럼 무던하다고 마음까지 무뎌지는 게 아니잖아요. 그늘에서 벗어나기 까지 한참 걸리더라고요.


우리는 택시를 타고 그의 집으로 가 한옥 마당을 내다보며 보리차를 마셨던가. 그는 출산을 며칠 앞두고 한 여름 경복궁 사거리에서 내가 버스정류장으로 사라질 때 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마도, 그건 지지의 손짓이었겠지.


그렇게 십년 넘게, 우리는 일년에 두어번 만나고 가끔 안부를 묻고 엽서를 쓰곤 했다. 그는 전세로 살던 한옥집이 팔리자 서촌에 작은 빌라로 이사했고, 역시나 그곳도 자신처럼 반듯하게 가꾸며 살다가 몇 년 후 다시 작은 마당이 있는 한옥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의 두 딸들은 화장실이 바깥에 있고 한 겨울에 보일러를 아무리 틀어도 실내온도가 18도 이상 올라가지 않는 집에서 겨울왕국 놀이를 했다. 나는 늘 그를 부러워했다. 생각한대로 마음 먹은 대로 한 가지씩 완성해가는 그의 삶을.


얼마 전 그는 충무로 인쇄골목에 사무실을 얻어 작은 갤러리를 오픈했다. 그처럼 단순하고도 명료한 선, 그러나 성글지 않고 꽉찬 질감의 따뜻한 흑백이 든 그림책 작가의 원화전이 열리는 3층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나는 활짝 웃었고 그는 작게 웃었다. 우리의 온도차가 이만큼이어도 서운할 일은 없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아마도 오래 그런 만큼의 거리를 두고 지내리라. 나도 그런 사람이니까.


바우어앤윌킨스의 스피커, 프리츠 한센의 세븐 체어,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디터람스의 브라운 커피 그라인더 같은 눈이 즐거운 물건들부터 도방의 흰 접시와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빚은 다관과 개다리소반까지. 그는 값진 무엇을 고를 수 있는 사람이었고, 나는 단단한 그의 등을 보며 걷곤 했다. 그의 취향은 내게 계절을 달리하는 잡지였고, 찰나의 눈부심을 뽐내는 크리스마스 스노우 볼이었다.


신기해요, 정말. 나의 말에 그는 웃었다. 뭐가요, 걷다보니 여기까지 온 걸요. 또 달라지겠죠.


그는 분명하고, 나는 그의 분명함을 좋아한다. 단단한 시간들, 작은 것을 모아 만든 단단한 시간들을 주머니에 넣고 가는 그의 분명함에 조약돌을 주워 길을 찾는 그림책 속 주인공의 모습이 떠올랐다. 돌아오는 길, 나는 빈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공기를 쥐어보았다.


산책, 비 오는 날도 뛰어요. 비 온다고 멈추지 말아요.


내게 자기 몫의 아이스커피를 쥐어주며 문 앞까지 배웅해주던 그는 11년 전 여름 같았다.


친구 2.


아니, 그래서 말이야. 삶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해? 아니, 나는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해. 그냥 사는 거지, 살아야 해서 사는 거야. 그런데 자꾸 목적을 만드는 거야. 의미를 찾고. 그래야 살 수 있거든. 그게 정당화가 되고 말이야. 그런데 사실 자기도 모른다. 진짜가 뭔지 모르는 거야. 그래서 자꾸 삶의 목적을 찾으려고 하는 거지. 모르니까. 어떤 사람은 인정받고 싶은 걸 목적으로 삼지. 또 어떤 사람은 권력, 혹은 성공 등등. 그런데 그게 목적이 된다고 생각해? 그건 그냥 살면서 만들어지는 거야, 저절로.




끄덕끄덕. 그래서?




그래서, 나는 요즘 그런 생각을 해. 이 순간이 무엇일까. 내가 원하는 게 뭐지? 이 행동의 이유는 뭘까? 오늘 아침에 말야. 차를 타고 가다가 시비가 붙었어. 그런데 내가 기분 나쁜거야. 그래서 차를 세우고 따졌지. 나는 그 사람의 사과를 원했던 걸까? 아니. 나는 그냥 화를 내고 싶었던 거야. 분출하고 싶었던 거지. 이해, 할 수 있지. 뭐, 그 사람이 엄청나게 급한 일이 있거나 혹은 내 운전이 답답했거나 등등. 그런데 이해하고 싶지 않은거야, 그 순간에. 나는 소리지르고 싶었던 거지. 지난 밤엔 무척 평온했어. 운동도 마치고 잠도 아주 잘 잤거든. 그런데도 아침엔 이런 마음이 들었어.




이쯤되면 나는 음, 혼돈에 빠진다. 그래?




그러니까, 그냥 사는 거지. 목적은 없어. 지금 내 마음을 보면서 살면 되는 거야.




그렇구나.




달리기는 계속 하고 있어? 그거 매일 뛰면 안 된다. 하루쯤은 꼭 쉬어야 돼. 근육도 휴식이 필요하거든. 뭘 계속하겠다는, 매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자. 되는대로 해. 되는 대로.




오, 친구여.




이 글의 마지막은 어떻게 할까?




되는 대로. 목적 없이 자유롭게. 지금 마음을 봐봐. 뭘 하고 싶어? 태도는 안 변해.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음의 태도지. 그건 쉽게 변하지 않아. 행위는 바뀔 수 있지만.




맞아! 그리하여 나는 여기까지 쓰고 엔터를 누른다.  내 마음의 태도 역시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므로.


































이전 08화 짧고도 긴 여행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