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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Jun 17. 2024

세신을 향한 여정

너를 보내기 위해 나는 그렇게도 바빴나 보다

철저한 사전 준비. 오랜 기간 공들인 몸, 엉덩이 부칠새 없이 분주한 하루.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직전 공복이어야 한다. 적당히 무르익은 몸과 정갈한 마음가짐으로 임하리라. 이는 ‘때목욕 후 비냉(비빔냉면)’을 대하는 나의 자세다. 하루짜리 일상여행을 무사히 마치려면 전날부터 내 나름대로의 철저한 사전준비가 필요하다.


'때' 목욕을 위한 적당한 '때'


수영장을 다녀 매일 샤워를 하기에 한 달에 한번 때목욕을 간다. 자주 가면 때도 안 나와 개운함도 없이 싱겁게 끝나 무척이나 시시하다. 제대로 한 것도 없이 끝나버리는 것 같아 여간 찝찝하다. 한 달은 묵혀야 때가 곱게 쓱쓱 잘 밀린다. 그러나 간혹 너무 오래 묵히면 나도, 세신사님도 힘들기에 한 달 사이클이 딱 적당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순전히 주관적인 기준이지만 내겐 상당히 중요한 사이클이다. 물론 단지 기분전환을 위해 목욕을 가는 경우도 있지만 때목욕은 ‘때’라는 분명한 목적성을 띄기에 그 시기를 가늠하고 때를 정하는 건 더없이 신중할 수밖에 없다. (내 입장에서) 


정갈해질 몸을 위한 정갈한 집


디데이가 정해지면 그 전날 저녁부터 분주하다. 식구들이 벗어놓은 빨래들을 부지런히 돌린다. 흰 빨래부터 시작해 색깔 빨래까지 구분 지어 빨고 베갯잇도 빤다. 빨래는 건조되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전날 저녁부터 시작해 당일 오전까지 이어진다. 때론 계절의 갈림길에 있으면 이불 빨래까지 겹쳐 일은 2배로 늘어난다. 참 거창한 거사라 하겠다. 정갈해질 몸을 위한 정갈한 집. 나만의 원칙이다. 미리 집안일을 해 놓지 않으면 깨끗하게 목욕하고 돌아올 내 몸이 땀나도록 바빠진다. 물론 안 해도 되지만 정갈한 몸엔 정갈한 주변이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 나 스스로 몸을 움직이게 된다. 그리고 이런 분주함. 정갈함을 위한 바쁜 몸놀림이 온종일 기분을 좋게 한다. 몸은 바쁘고 힘들지만 즐거운 마음만은 온전히 누린다. 이거야 말로 평범한 일상에 내가 만들어낸 비범한 행복이리라.


집안일로 바쁜 하루와 가벼워진 몸


그래서 작정하고 때목욕을 가는 날은 이른 아침부터 온갖 기계들이 더없이 분주하다. 세탁기는 연신 돌아가고 덩달아 청소기도 바쁘다. 청소기가 가지 못하는 길은 손걸레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일어섰다 반복하며 곳곳을 닦는다. 집이 넓진 않지만 삼천배하는 심정으로 정성스레 닦아낸다. 다음은 식기세척기. 식기세척기를 돌린다는 건 싱크대 작업이 마무리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싱크대 작업이란 곧 요리다. 따라서 이른 아침부터 저녁식사 준비에 돌입한다. 저녁준비는 식기세척기 외에 음식냄새 때문이라도 빨리 끝내야 한다. 음식을 볶고 지지는 동안 베일 냄새. 손등부터 내 머리카락까지 베일 그 냄새를 오랜 시간을 두고 날려야 한다. 그리고 집안 곳곳에 스민 음식냄새도 함께 빼야 한다. 청소기가 지나간 깨끗한 자리에 음식냄새를 남기고 싶진 않다. 이렇게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기, 식기세척기를 마무리하면 때는 오후 5시 전후다. 모두가 저녁준비를 할 시간에 난 그곳에 간다. 이제부터 온전히 나의 시간이다. ‘때목욕’을 즐길 마음은 충만해졌고 바쁜 하루를 보낸 내 배도 비워져 있어 몸도 가볍다. 



불변의 법칙 : 때목욕 후 비빔냉면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2만 5천 원을 내고 오롯이 ‘세신의 기쁨’을 누리면 된다. 뜨끈한 열탕과 사우나를 오가는 사이 내 몸도 녹고 마음도 녹고, 묵은 각질도 사라진다. 어제저녁부터 시작된 나의 분주함이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다. 이 개운함을 누리려고 나는 그렇게도 바빴나 보다. 공복에 쏟아내는 땀과 때는 내 몸과 마음을 한결 가뿐하게 해 줘 어디로 갈지 모를 내 인생에 대한 고차원적인 고민도 한결 가볍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내 1차원적인 고민이 시작된다. ‘배가 고프다. 먹어야겠다.’ 이곳에는 냉면집이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선택의 기로. 물냉인가 비냉인가. 그래 비냉에 물냉 육수를 따로 달라고 하자. 비냉으로 먹다가 육수를 넣으면 그게 물냉이지. 비냉으로 정했다면 이번에는 일반 비냉인가 회비냉인가다. 일반은 고기를 올린 거고 회비냉은 말 그대로 가자미 회를 올린 것이다. 나처럼 고민할 이를 위해 이곳엔 고기와 회를 함께 주는 섞어 냉면이 있다. 합리적인 의사결정 끝에 나는 ‘이모~ 섞어 하나요! 냉육수도 부탁드려요!’ 냉면이 나오기까지 시간은 10분. 그사이 주전자에 나오는 뜨끈한 육수로 공복을 달랜다. 땀을 빼고 먹는 육수가 내 수분을 꽉꽉 채워준다. 곧 당도할 매콤한 냉면을 대접할 내 위를 미리 달래기 위함이기도 하다. 수레에 실려 나에게로 오는 빨간 냉면. 단풍처럼 색이 곱다. 함께 온 시원한 육수도 한 모금 마셔 뜨거운 육수로 한껏 달아오른 내 입안을 진정시키곤 가느다란 냉면을 한 젓가락 들어 입안 한가득 베어문다. 욕심 내어 입안 가득 넣었지만 잘 끊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위를 써서는 절대 안 된다. 그건 냉면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스텐으로 고결한 냉면 명줄을 싹둑 자를 순 없다. 최선을 다해 내게 온 냉면을 대하리라. 오물오물. 조금씩 씹어 삼켜지고 입가에 빨간 양념 흔적만이 남아있다. 이 맛을 위해 나는 어제부터 그리도 바삐 움직였나 보다.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글쓰기’. 남은 인생은 글 쓰며 살고 싶은 내 꿈. '어떤 주제 글쓰기를 할까?, 글쓰기 루틴이 필요해! 오늘도 못 썼네...' 등 자기반성과 해야 할 것들에 대한 생각이 몽글몽글 피어오르지만 배출된 땀과 때만큼이나 한결 가벼워진다. '하면 되지! 뭐 별거 있나 시간 내서 주구창창 쓰면 된다!' 평소 무거웠던 인생 2막에 대한 고민을 수증기에 날려버린다. 어쩌면 공복의 목욕이 고민을 더 이상하지 못하게 종용하는지 모르겠다. '배고픈데 밥이나 먹고 하자!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어차피 가볍게 하는 고민이나 무겁게 하는 고민이나 지금 내가 해야 할 건 내 입에 맛있는 걸 넣어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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