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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Jun 10. 2024

세신의 기쁨

어린 시절 추억을 타고 오늘도 목욕탕에 갑니다.

어린 시절 38선 위, 휴전선 아래 연천군 군남면에서 자랐다. 아침에 북에서 확성기로 틀어대는 대남 방송을 듣고 일어나 학교에 다녔고 봄철엔 논두렁에 냉이를 캐다 삐라(대남 전단지)를 주워 경찰지서에 가면 도화지와 연필을 주던 최전방에 위치한 시골이다. 그렇다고 옛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초가집에 재래식 화장실, 물을 길어다 쓰는 옛날옛적 깡촌은 아니다. 집에 신식 화장실이 있는 양옥들과 초등학교, 중학교가 나름 번듯하게 갖추어져 있는 시골동네다. 그런데 이 동네에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목욕탕이었다. 


어린 시절 목욕탕 가는 날은 잔칫날


이런 시골에서 자라서 인지 어린 시절 '번화가' 즉, '도시=읍내' 기준이 목욕탕이었다. 당시 시골집에서 목욕탕을 가려면 40분마다 오는 버스를 기다려야 했고, 군부대와 대전차 방호벽이 여럿 있는 산길을 굽이굽이 지나가야 했다. 목욕탕을 이야기하는데 사설이 길다. 어쨌든 어린 시절 '목욕탕'이란 반나절을 온전히 시간을 내서 가야 하는 곳이었고 나가는 길에 읍내 5일장에 맞춰 엄마가 이것저것 맛있는 걸 사 오는 잔칫날이었다. 목욕하고 엄마가 사주셨던 버스 정류장 옆 호떡은 마흔 중반의 나이인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때 미는 날은 그런 날이었다. 시골에서 엄마 손잡고 소풍 가듯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맛있는 것도 먹고 오는 1년에 열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날, 1년에 10번도 안 되는 귀한 날이다. 서울 분이신 엄마는 서울서 근거리에 자주 가던 목욕탕을 시골 와선 어렵게 시댁어른에게 허락받고 가는 날이었다고 한다. 엄마나 나나 들뜬 날이다.


365일 매일 가고 싶은 목욕탕


이렇게 큰 내가 이젠 자차로 내가 가고 싶을 때 간다. 저소음 하이브리드에 엉따도 되고 천장도 열리는 차다. 회사 시절 아이디어가 안 떠오를 때, 윗사람과의 관계가 껄끄러워 ‘저 인간은 왜 저럴까..’ 속으로 싹혀야 할 때, 열 일을 하고 ‘이 정도면 됐어, 너에게 상을 줄게. 오늘 퇴근길은 목욕탕이다! 고급지게 스파라고 해주지!’ 회사를 졸업한 지금은 혼자 있고 싶을 때, 진정 아이들과 거리 두기를 하고 싶을 때, 수영장 휴관일인데 머리는 감고 싶을 때, 날이 찌뿌둥하니 몸을 풀고 싶을 때, 눈 오거나 비가 오는 날 야외 노천탕에서 눈과 비를 맞으며 뜨끈한 물에 몸 담그고 싶을 때. 목욕탕은 365일 365가지 이유를 들어 늘 가고 싶은 곳이다. 1년 내내 소풍 가고 싶은 마음으로.


호사스러운 목욕탕 가는 길


어린 시절도 시골이지만 지금도 도심에서 살진 않는다. 나름 신도시이나 논밭이 보이고 우거진 나무가 빼곡히 있는 언덕 낮은 산도 있다. 목욕탕 가는 길이 바로 그 길이다. 봄이면 핑크빛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길이요, 여름이면 청량한 초록잎들이 우거진 시원한 아름드리 그늘이 드리워진 길이다. 가을엔 단어 그대로 새빨갛고 쌘 노란색 사이의 스팩트럼을 모두 다 볼 수 있는 단풍이 바닥에 나뒹구는 비단길이다. 겨울은 어떠한다. 하얀색 눈이 논밭을 뒤덮는다. 삿포로 부럽지 않다. '러브레터'여주인공이 외치던 '오겡끼데스까'를 외치고 싶어 지는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그 길을 엉따 하고 묵은 때를 벗기러 가는 길은 영화롭기 그지없다. 1년 내내 변화무쌍한 자연을 벗 삼아 세신 하러 가는 이 길은 이렇게나 호사스럽다.


비루한 몸뚱이 세신사 이모님께 맡길게요


1만원 하는 입장료를 내고 꼭 함께 사는 건 얼음을 꽉꽉 눌러 담은 식혜다. 특히 겨울에 따끈한 탕 안에 앉아 얼굴만 내밀고 가늘고 기다란 빨대로 쪽쪽 빨아 달아오른 몸 안으로 차가운 식혜를 넣어주면 ‘아흐~~~ 아구 좋아라. 흐으응~~~ 이 맛이야!’ 나도 모르는 이상한 추임새가 입 밖으로 나온다. 단짠 아니 온냉을 함께 즐기며 불릴 수 있는 만큼 몸을 푹 불려주고 노곤 노곤 해지면 때를 민다. 아이 낳고 복직해 월급이 따박따박 들어오고 30대가 저문 시절부터인 것 같다. 내 몸 하나 고이 불려 세신사 이모님께 맡긴다. 어렸을 때 귀하게 가던 목욕탕이라 한번 가면 때를 끝까지 밀고 온다는 각오로 밀어서 인지 매번 세차게 밀어대 피딱지가 앉곤 했다. 이젠 전문가의 손을 빌린다. 그래 돈맛이 이 맛이다. 돈 벌어 뭐 하냐, 비루한 몸뚱이 하나 개운해지면 이게 돈 버는 보람이지. 전문가는 다르다. 때 타월 종류도 많다. 쎈놈부터 간다. 


세신사 이모 : "언니, 아파?" (대부분 나이 많은 어르신인데 나 보고 언니란다)

나 : "네, 아파요." (한 단계 낮은 때타월로 한다.) 

세신사 이모 : "이건?" 

나 : "이모~, 그것도 아프네요" (한 단계 더 낮은 때타월로 내려간다.)


아주 깔깔한 올이 굵은 타월부터 올이 무뎌진 얄팍한 타올로 차근차근 단계가 내려간다. 슥슥슥~ 앞판부터 밀고, 이모님이 다리를 한번 쳐주면 오른쪽 옆으로 눕는다. 구석구석 참 잘도 밀어주신다. 아이~ 좋아하고 멍 때리다 보면 다시 톡톡 다리를 쳐주신다. 그럼 몸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져 눕는다. 이렇게 시계방향으로 돌아 한판을 돌리고 또다시 전체적으로 때가 더 나오는지 확인사살 후 거품 타올로 마무리해 주신다. 간혹 타이거밤을 발라 살짝 마사지를 해주시는데 강렬한 맛에 중독된다. 돈을 더 주고 그 중독된 맛을 깊게 느껴보고 싶다. 이럴 때는 뭔가 특별함이 필요하다. ‘그래, 오늘 성과급 나왔잖아!’, ‘오늘 단타 쳐서 수익을 좀 냈어, 이걸로 하면 돼’ 여러 이유를 들어 세신사 이모님께 한 단계 높은 마사지까지 거하게 받고 마무리한다. 어떤 세신사 이모님은 중간중간 박자를 맞춰 가며 손가락을 튕기시고, 본인 손과 내 몸을 터치하며 쿵짝쿵짝 박수도 치신다. 이모는 돈 벌어 좋고 난 뭉쳤던 몸과 마음이 녹아내려 좋다. 서로 상부상조하는 관계다.


땀 빼고 묵은 독소 같던 불편함 감정도 빼고


묵은 때를 한 꺼풀 벗겨내고 마사지까지 받으면 한없이 개운하다. 이때 한번 더 그 개운함을 업그레이드시키려면 꼭 건식 사우나를 2번 한다. 한 번하면 아쉽다. 땀을 한번 쪽 빼고 정육점 불빛이 내리비치는 적외선 의자에 앉아 잠시 땀을 식힌다. 오감으로 온도를 느끼고 자극이 된 상태라 기분을 상하게 했던 머릿속 잔상들이 사라진다. 불편한 감정과 생각들을 비워내니 좋다. 이렇게 잠시 쉬었다 2차를 간다. 다시 모래시계를 거꾸로 두고 모래가 다 떨어질 때까지 5분 남짓 사우나에 앉아 있는다. 송골송골 처음 사우나에 들어올 때보다 더 빠르게 땀이 솟아오른다. 몸 안에 있는 독소가 다 나가는 것 같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나머지 앙금까지도 모조리 나가는 것 같다. 땀과 함께. 잘 가, 얘들아. 또 만나겠지만 그때도 이렇게 너희들을 보내 줄게.


옷을 한 겹 한 겹 입고, 젖은 머리를 말리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2시간 남짓 혼자만의 즐거운 소풍을 마치고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 간다. 그리고 또 출근을 한다. 아니했다. 이젠 더 이상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목욕탕 갈 핑계가 줄어든 것 같지만 핑계는 만들기 마련이다. 오늘은 어떤 핑계를 대고 목욕탕에 갈까? 미세먼지가 많아서 간다고 할까?! 근데 행복을 채우는데 핑계가 뭐 필요한가! 그냥 가서 즐기면 되지! 물론 세신비가 들긴 한다. 입장료 10,000원과 세신비 25,000원, 식혜 4,000원. 도합 39,000원 손에 쥐고 오늘도 난 일상의 행복을 위해 목욕탕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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