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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Jul 01. 2024

커피 - 일상의 커피

작지만 확실한 행복 치트키

회사를 나오고 아침마다 전쟁이었던 일상을 졸업하니 ‘내일은 맛있는 커피 먹으러 일찍 일어나야지!’ 다짐하며 잠자리에 든다. 내일 일에 대한 걱정보단 향긋한 커피를 먹을 기대감에 눈을 감는 일상이니 감사하다. 


집에서 마시는 굿모닝 커피


커피 한잔으로 시작하는 하루. 늘 변함이 없다. 일리 과테말라와 디카페인 캡슐을 찐하게 내려 우유를 넣고 우유 거품 위에 시나몬 가루와 브라운 슈가를 솔솔 뿌려 먹는다. 컵은 늘 친구가 선물해 준 연보라 머그잔이다. 캡슐 두 개의 커피 양과 우유를 부으면 딱 내 입맛에 맞는 커피 농도다. 우유는 항상 차갑게 보관된 남0사의 맛있는 우유를 사용한다. 그래야 거품이 단단하고 잡내 없이 고소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 느껴지는 시나몬 향은 늘 같은 향이다. 저렴한 대체품을 썼다 향이 맞지 않아 그대로 버렸다. 컵에 입술을 가져다 대는 순간 시나몬 향이 먼저 다가온다. 이내 단단한 우유 거품 아래 따뜻한 커피가 내게로 온다. 입술 끝에 붙은 하얀 거품에 딸려 온 브라운 슈가는 이른 아침 쳐진 내 기분을 한껏 까진 아니지만 기분 좋게 서서히 끌어올린다. 나 설탕이야. 단맛 한번 볼래?! 하고 푹 들어오는 백설탕 보다 비정제 된 브라운 슈가가 단맛을 한방에 때리지 않고 은은하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온다. 아주 느린 발걸음으로 말이다. 따뜻한 한잔의 커피는 긴 밤 동안 뻐근해진 몸과 몽롱한 정신을 천천히 깨우기에 적합하다. 이 커피 한잔을 마시며 쇼파에 앉아 책을 읽어나 날이 좋으면 베란다 캠핑의자에 앉아 그날 아침 하늘을 보며 언제나처럼 조용하고 서서히 하루를 시작한다. 그렇게 총총총 하루가 내게 온다. 


회사 일할땐 자기최면이요 집에선 꿈을 위한 땔깜이다.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여유 있는 하루를 꿈꾼다. 그리고 오늘 무엇을 하든, 어떤 일이 일어나든 충만한 하루가 되길 기원한다. 마치 정인수를 떠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듯 하나의 주술이요, 이른 아침에 올리는 새벽 기도 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한 긍정으로 자기 최면을 거는 명상이기도 하다. 바쁜 출근길에는 커피 명상을 위해 일어나야 할 시간보다 20분 일찍 몸을 일으켰다. 아침 공부도 아니고, 아침 운동도 아닌 굿모닝 커피를 위해서 말이다. 그만큼 내게 중요한 루틴이었다. 반갑지 않은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기 위해, 달갑지 않은 일을 시작해야 하는 하루를 위해, 힘차진 않지만 힘 내야 할 오늘 하루를 위한 나만의 당근 루틴. 회사를 졸업한 지금은 다른 의미의 굿모닝 커피 루틴이다. 늘 품고 있던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대단한 성과도 없는 일, 그럴싸한 성취감도 없는 일에 매진하기 위해 필요한 땔감이다. 엉덩이의 근력을 키워주기 위한 땔감. 커피 한잔으로 지펴지는 따뜻한 온기는 화려하게 피어 오르는 불꽃은 아니더라도 서서히 내게 스며드리라 믿는다.  


젊은 날 쓰디쓴 블랙커피


아침 커피는 늘 내게 같은 모습으로 오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위에 철벽을 친 젊은 시절에는 오직 블랙 커피 였다. 뒷맛이 살짝 산미가 느껴지는 까만 커피. 뜨겁게 잘 내려진 블랙커피 위에는 까만 바다에 낀 해무가 있다.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고 내일의 난 어떨지 모르겠는 밑도 끝도 없는 불안감.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하나, 다른 길은 없을까’ 하는 젊은 날의 조바심을 매일 아침 쓰디쓴 커피로 잠재웠다. 달콤한 설탕도 없이 말이다. 지나고 보니 별거 아닌 일에 애쓴 것 같지만 당시에는 고민 많은 시절이었다. 비록 종이 맛이 나는 종이컵에 담긴 뜨거운 커피지만 플라스틱 뚜껑을 열고 코로 마시는 커피 향기는 그 시절 고민거리들을 가져가기에 충분했다. 


컵받침으로 완성되는 블랙커피 매무새 


젊은 날 공복에도 잘 먹던 블랙커피는 이제 잘 먹지 못한다. 어린 시절에는 삶이 쓰렸지만 이젠 내 위가 쓰리다. 간단히 샐러드를 먹든 한 조각 빵이라도 먹고 나서야 먹는다. 그래야 한결 속이 편안하고 하루가 편안하다. 이제 블랙커피는 하루를 깨우는 커피의 기능이 보단 분위기로 먹게 된다. 커피잔과 드립의 과정. 꽃잎들이 나부끼는 꽃 잔이면 더 없이 좋겠지만 다방커피잔 마냥 민무늬의 새하얀 잔도 좋다. 가끔은 원색의 쌘 노란 또는 쌔파란 잔도 내게 경쾌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어떤 잔도 좋으나 이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은 잔받침이다. 나는 소중하니깐. 이젠 나에게 블랙커피를 완성하는 화룡점정은 컵 받침 이다. 잔을 받쳐 내어주면 대접받는 기분이 든다. 그 기분은 작지만 소중한 나임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그깟 잔 받침을 통해 소중함을 증명 받는 나이지만 그게 뭐 어떤가. 소중함을 깨닫는 치트키 하나는 확실하게 쥐고 있으니 자존감 떨어질 때 확실하게 써먹을 수 있다. 그뿐인가 따뜻한 커피를 살짝 들어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시곤 살포시 내려놓을 때 나는 소리, 커피잔과 받침대가 부딪히며 내는 소리는 내게 참으로 청아하게 들린다. 


어쩌다 들른 커피숍. 바 테이블에 앉아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소리 없이 조용히 음미하며 눈앞에서 내려지는 다른 손님의 커피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한 모금 머금고 부풀어오르는 커피 봉우리를 쳐다보고 다시금 한 모금 머금고 뜸 드리며 뜨거운 물을 부어내는 주인장의 손끝을 바라본다. 내 것도 저렇게 정성스레 내려졌겠구나. 감사하다. 오늘도 커피를 마시는 동안만큼은 더없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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