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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Jun 03. 2024

라벤더 애쉬

너에게 자유를 고하라

라벤더 말고 라벤더 애쉬. 크게 눈에 띄진 않지만 빛을 받으면 영롱한 보랏빛이 내 머리를 물든다. 퇴사 후 첫 기념 세리머니로 20년 만에 처음으로 염색을 했다. 회사 장착용 검정 레고 단발머리를 벗어던지고 라벤더, 그것도 애쉬로 용도 변경했다. 학생 때 입던 교복을 벗어던지듯, 그렇게 검정 머리를 졸업하고 자유를 얻었다. 보랏빛 꽃 길만 걷길. 스스로를 응원하며 머리색을 물드렸다.


독립의 단어, 라벤더 애쉬


단지 머리색 하나 바꾸었을 뿐인데 ‘날라리’ 란다. 아! 기분 째진다. 단박에 회사 때를 벗겨낸 것 같다. 9 to 6을 하지 않아도 되고 어르신들께 보고할 일, 명함을 주고받는 미팅도 이제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 고로 너에게 자유를 고한다. 네 멋대로 해라! 불혹을 넘긴 나이라 나름 조심스러워 혁명적인 색으론 하진 못 했다. 이 나이 되니 이런저런 인연으로 장례식에 가야 할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점잖은 양념 ‘애쉬’를 가미했다. 살짝 친 양념치곤 꽤 맘에 들었다. 바뀐 머리색은 그에 걸맞은 옷이 필요했다. 블라우스 몇 벌과 정장 바지로 돌려 입던 회사 교복에서 편한 티와 다양한 스타일의 청바지가 눈에 들어온다. 검정 머리가 라벤더 애쉬로 물들고 정장이 캐주얼로 바뀌니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다. 그래, 누구 말처럼 진작할 걸 그랬어! 마이 웨이.


설렘은 라벤더 애쉬를 타고


라벤더 애쉬가 불러온 나비효과 인가. 가벼워진 마음은 내 몸도 자유롭게 들뜨게 했다. 다들 코로나로 해외여행을 주저하던 시기라 저렴한 항공권과 프로모션 상품으로 이곳저곳을 날아다녔다. 타지에서도 라벤더 애쉬는 눈에 띄는 모양이다. 이스탄불로 수학여행 온 현지 청소년들에게 인기였다. 수줍게 다가오더니 “코리안?” “머리 이뻐요, 사진 찍어요” 한국말로 말을 건넨다. 난데없이 대여섯 명의 튀르키예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단체사진을 찍었다. 교토에서도 길을 물어본 아가씨에게서 "K-pop 좋아해요. 머리색이 이뻐요" 한다. 세부에선 "한쿡 아줌마, 나랑 사진 찍어요!" 한다. 들뜬 마음이 더 들뜬다. 무채색이었던 검정 머리 회사 사람이었던 내가 순간 블링 블링 보라돌이 ‘인싸’ 같았다. 누군가 이쁘게 봐준다는 것에 새삼 설레었다. 마음에 보라색 꽃이 핀 모양이다.


변화의 시작, 라벤더 애쉬


라벤더 애쉬로 ‘나’에 대한 주변의 시선이 바뀌었다. 바뀐 시선은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고 저 밑에 있던 말랑한 감정들을 다시 위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 감정들이 내 표정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래, 나는 이런 사람이었지.' 작은 것에 늘 감동하고 즐거워하던 나였는데 그간 많이 잊고 살았다. 길가에 핀 작은 꽃을 보고도 환히 웃던 나였는데, 너무 지쳐 있었다. 다시 맑은 하늘만 봐도 환하게 웃는 나로 돌아왔다. 회사는 떠났지만 자주 만나 밥을 먹곤 하는 회사 친구들이 먼저 그 변화를 알아챈다. "너, 정말 잘했다. 퇴사. 얼굴이 활짝 폈어” 공황장애와 불안장애로 힘들었던 회사 생활이 회사 밖에서 서서히 보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단지 머리 색만 바꾸었을 뿐인데 그것이 마치 트리거가 된 듯 실타래 같이 엉켜 있던 내 일상이 평온하게 풀려 나갔다. 불안했던 마음도 조금씩 희석된다. 라벤더 애쉬는 그렇게 천천히 내 일상에 마법처럼 스며들다 검은 머리카락이 자라는 속도만큼 아주 천천히 사라졌다. 


그리고 1년. 라벤더 애쉬는 이제 더 이상 내 머리카락에서 찾아볼 수 없지만 보라 보라 하게 설레었던 마음은 그대로다. ‘라벤더 애쉬’가 아주 깊게 뿌리내린 모양이다. 마음속에 행복 씨앗을 심어준 라벤더 애쉬,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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