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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Jul 03. 2024

경제적 독립 2 - 회사로부터의 독립

월급으로 독립, 월급으로부터 독립

회사는 경제적 자립을 도운 나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16년을 다니며 극적인 임금인상은 없었지만 매월 21일 일정금액이 통장에 찍히는 건 경제적으로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특히나 재직증명서와 원천징수내역서로 손쉽게 받을 수 있는 직장인 우대 대출은 가장 큰 장점이었다. 게다가 월급통장까지 해당 은행으로 변경하면 주택자금 대출도 낮은 이자율로 받을 수 있어 더없이 좋았다. 주택 매매가격이 크니 이자비용이 만만치 않은데 그에 대한 부담을 일정 부분 덜어낼 수 있었다.


주담 70% 생애 첫 아파트


월급만으로 충분했던 청년시절은 지나가고 결혼하고 아이들이 생겼다. 둘만 있던 공간에서 아이들 활동 공간까지 생각하며 집을 넓히고 싶었다. 아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는 놀이터가 엘리베이터만 타고 내려가면 집 앞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싶었다. 아이들과 함께 사는 공간은 보다 안전했으면 하는 바람. 그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저곳 다니기 위해 그에 맞는 차가 필요했다. 맞벌이 월급만으로 쪼개고 쪼개 살림살이를 넓히는데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한 사람 월급을 은퇴할 때까지 꼬박 모아야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온전히 내 집이 된다. 당시 집 담보대출이 70%여서 방 한 칸만이 오롯이 우리 거였고 나머지는 은행 거였다. 서울 도심도 아닌 서울에서 1 시간 거리에 있는 집값이 그랬다. 분양가에서 반토막이 난 집을 샀지만 그마저도 대출이 70% 라니. 우리 둘 월급만으로 살 수 있는 집이 그러했고 맞벌이 우리 둘 월급의 경제적 수준이 그러했다. 


일평생 벌어도 남는 건 집 한 채


남편은 늦은 밤 소파에 앉아 죽을 때까지 일해야 집 한 채 간신이 얻을 수 있는 현실에 눈앞이 캄캄했다고 한다. 남편은 정말 죽음을 각오한 직업, 소방관이었다. 내가 버는 월급으로 생활을 하고 남편이 버는 돈으로 집 대출금을 갚아나가는 생활은 외벌이 보다야 나았지만 목숨을 담보해도 한평생 집 한 채라는 현실은 남편을 숨 막히게 했다. 당시 나는 아침에 아이들 등원시키고 회사 출근하고 퇴근하면 끝나는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먼 미래를 보기보단 하루하루 무사하면 다행인 하루였다. 당시 나는 아이들을 직장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고 월급 나오는 회사가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루하루 버티는 삶이었지만 그 나름대로 의미 있는 하루였다. 설령 공황장애와 수면장애를 겪으면서도 말이다. 


집을 위한 집 매매


하루살이인 나에 반해 목숨을 담보로 하는 직업이었던 남편은 부단하게도 재테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어느 날 반차 내고 인감도장을 가지고 김포에 가자고 하면 은행에 앉아 주택담보대출 도장 찍는 내가 있었고 육아휴직 땐 애를 들쳐 엎고 부산에서 인천까지 비행기 타고 와 친정아버지 차를 타고 인천에 있는 어떤 집을 계약한 적도 있었다. 남편이 방법을 고민했다면 나는 재직증명서와 원천징수내역서로 목돈을 대출받아 집을 사기 시작했다. 몇십억 하는 부동산도 아니고 우리 수준에서 이자를 감당할 수 있는 집들을 몇 번 거래하니 목돈이 생겨 살고 있는 집 대출금 납입 연도를 조금 당길 수 있는 정도였다. 손해 보지 않아 웃을 일이었지만 슬픈 현실이다. 집값 대출을 감당하기 위해 다시 집을 사고파는 현실이 어이없어 웃기기도 하고 그럼에도 대출금을 모두 다 갚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납입 연도를 앞당기는 수준이라니. 월급만으로는 노후는커녕 지금 집도 온전히 내 집이 아닌 현실이 슬펐다. 월급 받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제야 깨달았다. 그런데 이 슬픈 현실도 직장생활을 꽤 오래 하고 나서 자각했다. 늘 따박따박 꽂히는 월급은 불안감을 잠재우기에 충분했고 저가 비행기라도 1년에 한 번은 해외여행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그나마 직장이 있어 다행이었지만 직장이 곧 경제적 자립은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월급은 다달이 신용카드를 포함한 금융비용만 낼 수 있는 정도니 말이다.


월급으로 독립했지만 월급의 노예는 아닐까?!


회사는 부모의 경제적 지원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스스로 먹고사는 걸 해결함으로써 인생에 대한 결정권을 오롯이 내가 쥐게 되었다. 또한 회사는 어른으로서, 사회의 한 구성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내가 하는 일들이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나 역시 이롭게 한다고 자긍심을 갖게 했다. 그러나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회사는 나의 의견이나 느낌, 생각, 감정은 배제된다. 회사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있고 그 방향을 해석하는 관리자들이 존재하는데 그들의 해석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보다 힘든 일이 없다. 회사의 방향, 정확히 말하면 상급 관리자의 방향, 때론 중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애매모호한 방향에 따라 일을 하다 보면 그것에서 오는 갈등을 감당해 내는 일이 나는 서툴렀고 힘들었다. 사회생활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당연히 받아들이고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그게 잘 안 됐다. 그래서 마음에 병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내 든든한 뒷배였던 회사는 어느덧 나를 짓누르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다달이 들어오는 꿀 같은 월급 역시 그 의미가 퇴색되어 갔다. 점점 더 피폐해져 갔다.


언제나 위기는 새로운 기회였다. 살아내고 보니 늘 그랬다. 어린 시절 서울 전학이 그러했고 돈 없이 지냈던 호주에서의 짧은 일상도 그러했다. 끝없을 것 같았던 취준 시절도 지나고 보니 성장통이었다. 하루살이 월급생활도 힘들게 치달았지만 남편의 부단한 재테크, 나의 재직증명서와 원천징수내역서로 자산을 조금씩 모아갈 수 있었고 코로나 시국에 사이드카가 몇 번이고 울리던 위기를 기회 삼아 월급 이외의 현금흐름이 생기며 마침내 월급으로부터 독립을 외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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