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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Jun 26. 2024

경제적 독립 1 - 부모로부터의 독립

대학시절 벌던 돈이 첫 월급보다 많았다

어린 시절 엄마에 대한 기억 중 하나가 ‘빚’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빠의 사업자금이 급할 때마다 여기저기 전화해 돈을 융통하는 것이 엄마의 몫이었다. 엄마의 소싯적 친한 친구부터 이웃, 아빠 친구 부인, 교회 집사님, 심지어 아빠 사무실에서 일하는 경리에게까지 엄마가 돈 꿔달라는 어려운 말을 하고 다녔다. 그렇게도 안되면 융자를 잡을 수 있는 건 다 잡았다. 우리 앞으로 되어있던 보험까지 고금리에도 불구하고 대출을 받아쓰곤 했다. 명목은 아빠의 사업 자금인데 늘 엄마가 뒷감당을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어려 아빠의 사업에 대해 알지 못해 늘 엄마만 보여 그러했는지는 모르지만 돈을 빌려 오는 건 엄마였다.  물론 아빠 사업이 잘 될 때도 있었다. 그 덕분에 시골 깡촌에서 서울로 유학도 오고 과외도 받을 수 있었으니깐 말이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과외를 받았는데 줄 현금이 없어 어음을 줬던 기억도 난다. 엄마 말씀이 “선생님, 이거 문제없는 수표예요. 은행 가서 바꿔달라고 하면 되는데 지금 바로 가시지 말고 다음 주에 가주세요. 지금 어음을 바꾸면 어음 처리를 해야 하는데 당장 현금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형편에 맞지 않는 과외 덕분이었을까 대학에 들어갔고 첫 등록금도 무사히 낼 수 있었다. 


회사 첫 월급이 대학시절 과외비보다 적었다


성인이 되니 지출이 커졌다. 그에 반해 내 용돈은 들쭉날쭉이라 대학 입학 후 여름이 오기 전에 과외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주 2회 2시간씩이었는데 과외 1건당 내 한 달 용돈이 딱 떨어졌다. 그때 처음으로 부모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했다. 내가 돈 벌어 나 스스로 규모 있게 지출을 계획할 수 있어서 좋았다. 게다가 과외는 또 다른 과외를 낳았다. 과외를 받던 학생 어머니들이 주변에 소개를 해 하나씩 늘어갔고 대학 선배가 졸업하며 물려준 과외까지 더해져 5건을 동시에 한 적이 있었다. 강북에서 강남으로 건너가니 페이가 2배로 뛰었다. 취업 후 첫 월급이 당시 과외비 보다 적었으니 꽤 큰돈을 대학생 때 벌었다. 당시 돈 모아 유럽여행 가는 게 소원이었는데 그 돈은 고이 엄마에게로 갔다. 물론 시골집 생활비 내지는 아빠 사업자금으로 들어갔으리라. 그래도 부모님 도와드린 것으로 됐다. 싶었다.


결국엔 망하고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아빠 사업은 망했다. 아빠, 엄마 모두 파산했다. 그리고 남동생은 군대를 갖고 나는 호주로 갔다. 좀 더 안정적이고 큰 회사로 이직을 하고 싶었지만 특별한 이력과 영어 스펙이 없던 당시 나로서는 연봉을 더 올려 받을 수 없다 판단했다. 그래서 가장 비자받기 쉬운 호주로 떠났다. 떠나기 전 비행기표와 단기간의 정착금이 필요해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하루 1끼 먹고 버틴 일상이었다. 그래도 힘들단 생각은 안 했다. 밥을 못 먹는 건 내가 다이어트 중이라 여겼고 곧 새로운 기회를 안겨줄 호주로 간다는 생각으로 그 시간을 버텼다. 


돈 없이도 잘 다녔던 호주 생활


호주에서도 일은 계속됐다. 일식당에서 접시 닦기, 웨이트리스로 일을 했고 농장에서도 일을 했다. 한 번은 월급제 일본 식당에서 1달을 다 못 채우지 그만 두어 돈을 못 받고 나온 적도 있다. 결과적으로 학원 선생님의 스트롱 레터(불법 노동에 대해 신고하겠다는 내용)를 내밀곤 며칠이 지나서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면전에서 일본 사장이 침 튀겨 가며 거칠게 해 대는 욕을 듣고 나서였다. 그렇게 번 돈은 대부분 교통비로 썼다. 땅덩어리가 넓으니 이동할 때 비행기를 타야 했다. 주로 값싼 야간 비행기 타고 새벽에 내려 공항에 멀뚱이 있기도 했다. 그렇게 호주생활은 돈 없이 지내는 일상이었다. 가고 싶은 도시마다 3~4시간 일하고 숙식을 제공받는 형태로 머물렀다. 젊으니 사서 하는 고생이라 생각해 힘들지 않았고 인생의 밑거름이라 여겼다.


변한 것이 없다. 이대로 있다가 영농후계자 될 판!


그렇게 1년 조금 모자란 시간을 보내고 한국에 들어왔다. 취직을 위해 핸드폰 개통비만 들고 들어왔는데 암담했다. 파산한 부모님. 그 사이 아빠는 한쪽 다리 연골이 모두 닳아 다리를 절고 계셨고 사업하던 분이 돼지와 소를 키우는 농장일을 하고 계셨다. 변변한 직장을 잡지 못하면 시골 농장에서 이내 생을 마감할 것 같은 암울함이 엄습했다. 호주에서 1년을 보냈는데 토익 점수는 제자리다. 농장 탈출을 위해 토익 공부에 매진했고 이력서에 한 줄 스펙이 생겼다. 3개월의 백수시절을 접고 취직을 했다. 광화문 사거리 으리으리한 건물들 사이에 내 회사가 있었고 그곳에 내 책상이 생겼다. 그렇게 또 한 고비 넘긴다. 물론 이때 월급도 내 과외비에 미치지 못해 당시에도 투잡을 했다. 


회사다운 회사의 정규직, 독립된 성인의 첫 단초


회사는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였다. 내 경제적 독립의 근간이 되었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충분조건을 갖춘 듯했다. 내 이름 석자가 박힌 명함과 명패는 사회적으로 독립된 인간임을 증명하는 증거이기도 했다. 적어도 당시에는 말이다. 광화문까지 출근하기 위해 편도 2시간, 왕복 4시간 거리를 오갔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여주인공이 딱 나였다. 버스 타고 기차 타고 지하철 타고 여행 가듯 매일 광화문으로 출근했다. 처음 하는 일은 익숙지 않아 버벅 대기 일수고 배워야 할 것들이 많았지만 마냥 즐거웠다. 정규직 회사원이 되었다는 큰 기쁨으로 신입사원 시절을 보냈다. 


자본주의 회사는 신용을 담보해 주는 든든한 나의 뒷배


내 인생을 온전히 책임지는 어엿한 어른이 된 기분이다. 독립된 인간. 그 기쁨의 원천은 매월 급여통장에 꼬박꼬박 꽂히는 목돈이다. 과외는 비정규직이다. 4대 보험도 되지 않는다. 돈은 많이 벌지만 신용을 담보해 주지 않기 때문에 신용카드 하나 만들기 어렵다. 경제활동 인구로 내 회사가 나를 신용보증하기 때문에 금융권에서 쉽게 대출도 되고 신용카드도 만들 수 있다. 이 얼마나 안전한 뒷배인가. 회사가 나를 채찍질해도 참고 인내하리라. 이 회사를 다니며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다. 추억이 가득한 좋은 회사. 그러니 그곳에서 16년을 몸 담았다. 긴 세월, 대부분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일했다. 일에 대한 성취감도 있었고 재미있었다. 영원히 달릴 것 같았던,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았던 회사. 그러나 특정한 계기와 상황이 맞물리며 끝이나 버렸다. 


퇴사는 먼 훗날의 일이라 여겼는데 입 밖으로 말하니 일사천리로 마무리됐다. 2번의 면담과 전자결제 사직서클릭 몇 번으로 난 회사를 나왔다. 내 경제적 독립을 도왔던 든든한 내 뒷배가 그렇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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