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코다테 여행 ep5. 겨울, 봄 그리고 가을의 오누마 국정공원
하코다테 여행 ep4. 늦은 오후에 올라가 노을과 야경 담기 에 이은 글입니다.
일본 3대 야경이라는 하코다테 야경. 그것을 보려고 삿포로에서 장작 4시간을 갔다. 인천에서 삿포로까지 비행기로 3시간인데 그보다 1시간이나 긴 여정을 택했다. 급행 기차라지만 좀처럼 당도하지 않는 하코다테는 가는 내내 멀게만 느껴졌다. 간간히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바다를 보다, 졸다, 먼산도 한번 봤다 긴 여정 끝에 하코다테에 가닿았다.
히잡 쓴 여인들이 무슨 일로 내린 걸까?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낮시간인데 물안개가 피어 있는 길을 기차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다. 습지도 아닌 곳이 키가 큰 풀과 물이 한대 어우러져 몽환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이내 작은 기차역에 정차한다. 히잡을 쓴 여인들이 캐리어를 끌고 열차에 오른다. 분명히 여행객들인데 이 작은 역에 무슨 일로 내렸을까?! 세월을 담고 있는 역 이름 간판에 ‘오누마코엔’이라 적혀있다. 이곳이 어떤 곳이길래 저 여인들을 머물게 했을까? 구글링을 해 보니 우리에게도 익숙한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원곡의 모티브가 되었던 곳이다. 하코다테로 향하는 기차가 물 위를 걷는다. 물안개 너머로 어마어마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것 같아 나를 설레게 한다.
흰 눈밭아래 어떤 것들이 숨겨져 있을지 설렌다
첫 오누마국정공원은 흰 눈밭의 설렘이었다. 코로나 직후이기도 했고 이른 아침이라 아무도 밟지 않은 곳을 혼자 거닐었다. 흰 눈 아래 숨겨져 있는 낙엽을 밟고 춤사위를 보이곤 했지만 고요히 그곳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커다란 호수 위 작은 섬들을 연결한 다리를 하나씩 오르며 아무도 없는 눈길 위를 그렇게 1시간 동안 머물렀다. 커다란 호수가 꽁꽁 얼어있다. 흰 눈 아래 물빛은 어떨까? 이곳의 사계절이 궁금해졌다. 봄에는 어떤 꽃들을 품을지, 여름에 스치는 바람은 어떤 소리를 낼지, 가을 단풍은 얼마나 고울지 궁금하다. 같은 곳이지만 지금과 많이 달라질 모습에 또다시 설렌다.
그곳에 가면 천 개의 바람이 있어요
벚꽃이 한창 흐드러지게 피는 시즌에 가고 싶었지만 벚꽃 마냥 비행기값도 한창이라 벚꽃 시즌을 살짝 빗겨 다시 이곳을 찾았다. 늦은 벚꽃과의 인사지만 이름 모를 다른 꽃들이 조용히 낮은 곳에서 나를 반겨준다. 잔잔한 호수길을 따라 나있는 노랗고 보랏빛 나는 꽃들이 정겹다. 호수 너머로 보이는 고마가타케 산. 전에 없던 풍광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자기 존재를 웅장하게 내뿜고 있었는데 그때는 왜 보이지 않았을까?! 지난번에 나는 무엇을 보고 온 걸까?! 겨울에 운행하지 않던 작은 크루즈가 호수를 가른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본다. 봄을 살짝 빗겨 여름으로 향해 가는 시기라 뺨을 스치는 바람이 신선하다. 달아오르지도 않고 식어있지도 않은 적당한 바람. 물 위 한가운데서 맞이하는 바람은 거세지만 내 몸이 감당하기 딱 좋은 크기다. 바람의 온도와 소리만 느껴진다. 땅 위에 발을 디디니 다른 갈래의 바람이 느껴진다. 나무 사이를 비집고 나는 바람소리. 이곳에는 정말 천 개의 바람이 있었다. 나무 종류에 따라, 나무 높낮이에 따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잎 모양과 머금은 물 양에 따라 소리가 여러 갈래다. 그 바람이 드넓은 호수를 따라왔는지, 산기슭을 타고 내려왔는지 바람길도 소리의 모양을 다양하게 해 준다. 천 개의 바람 기념비 앞에 고요히 눈을 감고 한동안 머물렀다. 겨울에 눈길을 거닐었다면 늦은 봄, 이른 여름 앞에선 그렇게 바람길을 거닐었다.
가을 단풍을 탐하다
이례적이었던 엔저와 삿포로행 비행기 특가가 다시 내 마음을 들뜨게 한다. 가을 단풍을 보면 그곳의 사계절 풍경을 모두 눈에 담을 것만 갔다. 또 욕심을 냈다. 무르익어가는 오누마 공원의 가을은 공원 입구부터 여러 크기의 호박으로 단장되어 있다. 핼러윈을 기념한 것들이다. 고운 색을 담고 있는 단풍은 더할 나위 없이 어여쁘다. 바람 역시 제 갈 길을 가며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랫가락에 맞춰 춤을 추는 걸까? 빠른 걸음으로 구름들이 지나간다. 커다란 뭉게구름이 성큼성큼 가면 이내 아기구름들이 잰걸음으로 따라간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가위로 오려 올려놓은 것 마냥 또렷하다. 한동안 흰구름 향연이더니 순식간에 짙은 구름이 몰려와 보슬비를 흩뿌린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구름이 걷히니 다시금 햇살이 드리워진다. 이곳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다. 오늘은 평일인데도 유난히 관광객들이 많다. 해외 관광객들도 많지만 유독 일본 어르신들과 수학여행 온 일본 청소년들이 많다. 일본 내에서도 이곳 가을 풍경은 유명한가 보다. 삼삼오오 스쳐 지나가는 청소년들의 웃음소리만으로도 그 혈기가 느껴진다. 별거 아닌 일에 까르륵 대는 아이들의 경쾌한 웃음소리에 나 역시 입꼬리가 올라간다. 나도 그랬지. 저 나이엔 웃음거리가 많았지. 국제전화로 걸려온 아들 녀석이 급식으로 비싼 하겐다즈가 나왔다고 세상 놀라워하니 나도 웃음이 난다.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온통 행복한 것들로 가득 차 있던 어린 시절이 마냥 부럽다. 앞에 걸어가는 노부부. 할아버지의 옷깃을 가다듬어주는 할머니의 손길이 살뜰하니 다정함이 보인다. 이 세상에 둘 뿐. 마지막을 약속한 사이. 내가 기댈 곳은 당신이고 당신이 기댈 곳은 나뿐이라고 서로 이야기하는 것 같다. 새하얀 머리에 새하얀 이를 가지런히 드리운 할머니의 미소에서 젊은 날 뜨거웠던 애정과 긴 세월을 함께한 애잔한 사랑이 보인다. 백년해로 하는 그들을 보니 나도 그러했으면, 우리도 그러했으면 희망한다. 그리고 형형색색으로 무르익어가는 가을처럼, 천 개의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이곳처럼 내 인생도, 우리의 인생도 여러 갈래 길로 지나가겠지만 이내 그 열매는 아름답게 무르익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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