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다. 잊었을 리 없다.

핑클과 함께 내게 남아 있는 것들.

by 캐롤

아침부터 카페에 앉아 단편 소설을 읽었다. 소설 속 주인공이 가족들과 함께 마당에 가마솥을 걸어두고 닭을 삶아 먹는 장면이 나왔다. 나도 백숙이 먹고 싶어졌다. 가마솥에 장작으로 불을 때서 푹푹 고아 먹는 백숙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외할머니집엔 그런 가마솥이 있었다. 닭이 삶아지는 냄새와 가마솥에서 닭을 집어 그릇에 담던 할머니의 주름진 손이 떠올랐다. 아니, 삼계탕만 먹어도 좋겠다. 남편에게 불쑥 메시지를 남겼뒀다. ‘오늘은 백숙이나 삼계탕이 먹고 싶네. 어때?’

다시 책을 읽었다. 이번엔 주인공이 이모와 캘리포니아롤을 먹었다. 캘리포니아롤은 추억의 음식이었다. 남편과 신혼때 자주 가던 옆 동네 식당이 생각났다. 이름이 뭐였더라? 번뜩 기억이 나지 않았다. 캘리포니아롤은 진짜 먹은 지 오래되었다. 육아를 시작한 후론 한 번도 먹지 않았다. 그 식당은 노키즈존이었다. ‘oo동 캘리포니아롤’이라고 검색을 했다. 가장 최근 리뷰가 2020년이었다. 코로나 여파에 망한 모양이었다. ‘배달의 민족’을 켜 검색을 해보았다. 원하시는 정보가 없어서 유사한 걸 검색했다며 ‘돈까스롤, 시나몬롤’을 찾아줬다. 유튜브에서 ‘캘리포니아롤 만들기’를 검색했다. ‘김밥김, 게맛살, 연어, 아보카도, 날치알, 오이’ 등이 필요했다. 그거 하나 먹겠다고 이걸 다사라고?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대형 마트 즉석 식품 코너에서 캘리포니아롤을 본 기억이 났다. 네비게이션으로 찍으니 11분이면 갈 수 있었다.

신나게 출발하자마자 신호등에 걸렸다. 라디오를 틀었다. 이제 막 핑클의 'NOW'를 틀 거라는 멘트가 나왔다. 선곡 마음에 들어쓰. 출발이 좋았다. DJ는 이효리를, 게스트는 옥주발 파트을 맡겠단다. ‘왜 옥주현은 꼭 옥주발이라고 부르는거야, 그럼 나는 성유리와 이진을 불러야지.’라고 생각했지만 나도 계속 이효리와 옥주발 파트를 불렀다. 역시 노래는 질러줘야 재미졌다. ‘개미 두 마리, 개미 세 마리~ 늘 바래왔던 상상처럼. 우후~!’ 갑자기 중간에서 노래가 끊겼다. 딱 신이 나고 있었는데 맥이 빠졌다. DJ는 퀴즈를 냈다. ‘모든 ( )을 다 주고 싶은 나.’의 가사를 채우는 것이었다. 너무 쉬운 거 아냐? 사랑이잖아, 사랑. ‘모든 내 사랑을 다 주고 싶은 나!’ 혼자 큰 소리로 다시 불렀다. 어깨가 으쓱해졌다. 이런 걸 잊었을 리가 없다. 퀴즈는 객관식이었다. 1번 '내 재산', 2번 '내 사랑' 둘 중 정답을 골라 샵 몇 천번에 문자를 보내라고 했다. ‘아~ 재산? 내 재산을 모두 주고 싶을 정도면 엄청 사랑하는 거 아닌가? 사랑이야 언제든 주지~ 재산은 진짜 사랑해야 주는 거 아닌가, 으흐흐.’ 했다가, ‘역시 나도 속물 다 됐군, 아줌마야 아줌마.’하면서 피식거렸다. 퀴즈가 끝나고 나니, 이번엔 핑클의 '영원한 사랑'을 틀어줬다. 선곡 좋고. 나는 ‘이젠~~~ 내 사랑이 되어줘~’ 소리 지르면서 운전을 했다. 이건 엉덩이 뒤로 손을 모으고 폴짝폴짝 뛰어줘야 하는데 양손을 뱅글뱅글 요래요래 돌려줘야 하는데 지금 운전을 하고 있는 게 영 아쉬웠다.

마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막 나서려는데 전화가 왔다. 아이 문센에서 만나 친해진 언니였다.

“너 뭐해?”

“나... 으흐흐,”

“왜? 뭐하는데?”

“나 캘리포니아롤이 먹고 싶어서 으흐흐. 언니 기억나? 우리 대학생때쯤 엄청 유행했었잖아.”

“난 한 번도 못먹어보긴 했어. 그래서 먹으러 갔어?”

“아니, 파는 데가 없어서 마트 가볼라고. 아무래도 유행이 지났는지 파는 데가 없네. 마트에서 본 것 같애. 그래서 사러 왔어. 으흐흐”

“근데 왜 그렇게 웃어? 으흐흐.”

“그냥 웃기잖아. 임신한 것도 아닌데, 계속 뭐가 먹고 싶네? 먹고 싶으면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고 꼭 챙겨 먹어 요샌. 살찔 건가봐. 언니도 하나 사다 줘?”

“아니 됐어. 난 점심 먹었어.”

“아, 근데 왜 전화했어?”

“아, 맞다. 나 고민이 있어.”

언니의 고민은 이랬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같은 반에 여자 아이는 언니 아이를 포함해 딱 셋인데 둘이서 하나를 따돌리고 괴롭힌다고 했다. 선생님과 상담도 해보았는데 언니 아이가 너무 활발해서 다른 여자 아이들이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것 같다고만 하셨고, 남자 아이들과는 잘 지내니 큰 문제는 없다고 하셨단다. 근데도 아이는 아침마다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울어서 난감하다고 했다.

“언니, 걔들 봤어? 분명 그 둘 중 하나가 엄청 셀 거잖아. 하난 그냥 동조하는 걸 테고. 겨우 셋인데 따돌림당하면 애 맘이 어떻겠어. 차라리 여럿이면 무리도 여럿이라 딴 무리로 가 놀면 그만인데. 난 그렇다. 언니, 그러고 보니까 나도 애한테 맨날 말해. 여자애들이랑 잘 놀아야 한다고. 언니 알지? 우리 애도 중성적이잖아. 언니들한테 잘해야한다고. 오빠들하곤 싸워도 돼. 언니들한텐 무조건 잘하라고. 언니들하고 여자친구들하고 잘 지내야 한다고. 언니, 뭔지 알지? 그 여자애들 기집애짓 하는 거. 여자애들끼리의 삶에서 살아남으려면 눈치코치 다 필요하잖아. 우리도 어릴 때 한 번씩은 다 힘들어봤잖아. 꼭 그 못된 애 하나가 따돌리잖아. 그럼 나머진 걔 눈치보면서 동조하고.”

“알지알지. 남편한테 안그래도 말해주면서 애들 사진 보여주니까, 가시나 성깔 더럽게 생겼네, 그러더라. 크크크. 고 쪼끄만한 것들도 이제 지성질이 얼굴에 다 드러나. 어딜가나 그런 애들 있잖아, 못되먹어가지고. 학교가면 더 심할건데. 난 그런 거 딱 싫었어. ”

“나도나도 언니, 근데 거기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배우는 거지. 지금 이 나이에 이제 그런 인간 관계를 배워가는 거 아니겠어? 적어도 그 못된 가시나 눈에 들면 안되는 거야. 어떤 의미로든. 친해지면 자기 딱까린줄 알고, 찍히면 일년이 괴롭잖아. 아~ 세 명, 진짜 어렵다. 차라리 넷만 돼도 둘, 둘 놀텐데.”

“그래그래. 니말이 뭔지 알겠어. 알지알지. 아 진짜 넷만 되도 걱정이 없겠다.”

“집에 오면 좀 이것저것 슬쩍슬쩍 물어봐. 다른 여자애들이 뭐때메 애를 따돌리는 건지도 좀 생각해보고. 그 너무 활발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고민해보고. 남자애들하고 백날 잘놀면 뭐해. 갈수록 동성끼리 잘 지내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남자애들하고만 잘놀면 여자애들이 더 싫어하는 거 알지? 그리고 일단 애가 유치원 가기 싫다 그런다매. 그건 애도 잘 지내고 싶고, 스트레스 받고 있단 건데. 언니 나도 엄청 신경 써, 그거. 나도 늘 어린이집 가면 애가 남자애들하고만 놀고 있고. 그럼 늘 ’낼은 윤주하고 시은이하고 지온이하고도 놀아. 알았지?‘ 하고 가르치는 거야. 은근하게. 아 진짜, 애 하나 키우는 것도 참 이리 신경 쓸 게 천지다.”

“그니까, 이런 것까지 고민할 줄 누가 알았겠니?"

"그러게, 애키우는 게 젤 어려워. 언니, 근데 어디 놀러갈만한 데 없어? 이제 코로나도 끝나가고 우리도 어디 좀 가보게."

"우린 지난 주에 부산 가서 새로 생긴 롯데월드 갔는데 좋더라?”

우린 새로 생긴 롯데월드 이야기를 십 분 더하고 전화를 끊었다. 언니와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캘리포니아롤 비슷한 누드김밥을 찾았다. 마요네즈에 버물인 게살이 들었고, 김밥 위엔 날치알이 묻혀져 있었지만 밥 양이 지나치게 많았다. 수산코너에서 포장된 연어회 중 가장 적은 것을 골랐다. 같이 먹으면 얼추 비슷한 느낌이 날듯 했다. 튀김우동 작은 사발면과 파인애플도 카트에 담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핑클의 루비를 찾아 들었다. 유리창을 꼭 닫고 에어컨을 켰다. ’I CAN’T CRY~ 그래 널 보내주겠어, 난 무엇도 바라지않아.‘ 목소리가 갈라졌지만 큰 소리로 불렀다. 옥주현은 참 이때부터 노래를 잘 불렀네, 생각했다. 참 오래전 불렀던 노래들인데도 이렇게 가사를 다 기억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잊었을 리 없다. 노래가 끝나고 주변이 조용해졌다. 신호등에 걸려 차를 세웠다. 멍 때리다가 하원하면 오늘은 누구랑 놀았느냐고 잊지말고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언니와 한 대화를 다시 생각해봤다. 뭐라 딱 설명하긴 어렵지만 내가 했던 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 난 언니에게 뭐라고 말해야 했던 걸까. 왜 난 늘 애한테 여자애들과 잘 놀아야 한다고, 언니들하고 잘 지내라고 말해왔던 걸까. 누구와 누구와 누구의 얼굴이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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