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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방의 공돌이 Apr 12. 2021

단정하지 않는다

내가 제주에 온지는 10년이 되었다. 회사생활 지긋지긋해서 제주로 왔다. 제주로 와서는 소규모 자영업을 했다. 작가로도 살았다. 자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꾸준히 에세이와 장편소설을 써 출간을 했다. 그것만 한 건 아니다. 자영업자, 작가 말고도 알바 아저씨, 청소부, 백수, 용접공으로도 살아봤다. 그러나 나의 정체성은 언제나 작가였다.


지금은 작가와는 거리가 좀 멀다. 다시 직장인이 되었다. 계속 작가로 존재할 수 있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별로 대수롭진 않다. 원래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할 수밖에 없는 일은 제각각이다. 적당히 균형 잡고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글은 늘 가까운 곳에 있다. 나는 나의 의지로 작가일 수 있었 듯이, 작가와는 멀어진 것 역시 나의 의지다. 어떤 직업 하나로 나를 규정하고 싶지 않다.


과거, 오랜 직장생활의 피로감 때문에 나는 큰 조직을 움직이는 시스템의 일부일 뿐이라는 생각에 빠졌다. 내가 하찮은 부품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니 열정은 싸늘히 식고 자부심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격무와 스트레스도 지긋지긋 했다. 결국 서울을 떠나 제주로 왔다. 그런데 제주에서 다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오래 전, 회사만 떠나면 행복하리라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다. 회사생활이 내 삶을 좀먹는다고 생각한 것도 착각이었다. 도망치듯 내려온 제주에서 다시 회사생활을 한다는 건 상상하지 못 했었다. 내가 다시 옛날처럼 일할 수 있기를 바랄 거라곤 생각지도 못 했었다.


이제는 그 무엇도 단정하지 못 하겠다. 단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지를 깨달았다. 내가 다시 조직을 그리워하고, 동료를 원하고, 일을 하고 싶어 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 했던 것처럼 말이다.


제주에서 다시 회사생활을 하고 있는 이 상황이 재미있어서 자주 피식 웃는다. 삼나무 숲길을 달리는 차창 밖으로 노루와 소떼가 보이는 출근길이 꽤나 낭만적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물론 이 길이 언제까지나 낭만적일 거라고 감히 단정하지 않는다. 언제든 위기는 올 수 있고, 또 일이 지겨워질 수도 있다. 다만 그때가 되면 다시 옛날처럼 회사만 떠나면 난 행복할 거라고 단정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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