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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십편 May 22. 2023

나는 금쪽이 같은 며느리였다

< 돈을 잃고 얻은 것 > 83년생의 집


보조출연 아르바이트를 가면 드라마의 주인공들을 거의 늘 만난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때는 박은빈 배우의 바로 뒷줄에 앉았고, 모범택시 때는 주인공인 이제훈 배우가 바라보는 문구점 안에 서있게 되어서 멋진 이제훈 배우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이 일을 하는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많은 주인공들을 보았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래도 재밌는 건 그날 하루의 강력한 주인공은 그 배우들이 아니라 나였다는 것이다. 내가 쓰는 일기에는 박은빈 배우도 이제훈 배우도 단역 정도의 비중으로 잠깐 등장할 뿐이라는 것. 드라마를 시청하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니까, 우리는 일인칭 시점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지금까지 내가 쓴 <83년생의 집>도 마찬가지겠다. '남'에 대한 부분은 최대한 진짜 나누었던 대화, 객관적인 사실을 간결하게 적으려고 노력했지만 누군가와 대립되는 상황이 있었다면 어디까지나 나의 입장일 뿐이다.







 


코인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잃었다고 말했을 때, 남편은 단 한 마디의 책망도 비난도 하지 않았다. 결국 다달이 밀려오는 압박감을 버티지 못하고 부동산에 집을 내놓으러 갔던 날조차.



그렇다고 희망적인 말을 할 자신은 도저히 없었던지 "이제 정말 큰일이네...!"라고만 말하더니 말없이 걸었다. 공원이었는데 잡고 있던 손은 놓지 않았다. 그날 이후 1년이 다 되어가지만 내가 미안해할까 봐 주식이나 코인에 대한 이야기는 화제에 올린 적이 없다.


빚투 한 카드 대금에 쫓기던 내가 프로모션이 걸려 있는 쿠팡 배달을 같이 하자고 조른 적이 있었다. 하다 보니 주택가 골목에 정차할 때는 한 사람이 남아 있는 게 수월할 것 같았다. 나는 운전을 맡고 남편은 배달을 맡았다.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한 남편의 등이 땀에 다 젖은 것을 보니 너무 미안했다. 내가 하자고 해놓고 힘든 건 또 남편이 다했다.


"오빠, 미안해..."


남편이 대답했다.


"아냐, 장모님이 애들 봐주시니까 데이트하는 기분 든다! 우리 햄버거 먹고 들어갈까?"


아마 입장이 바뀌었다면 나는 "으이그!! 이게 뭐야!! 오빠가 코인만 안 했어도 이 정도로 힘들진 않았을 거야!"라고 말했을 텐데. 아니면 최소한 "나니까 참았다." 하고 생색은 냈을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형편이 더없이 악화되어 가도 남편은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나는 나쁜 머리를 굴리며 골똘히 생각했다.



'어머니 아버지께선 남편을 어떻게 저렇게 좋은 사람으로 키우셨을까'


의미 없는 질문. 이미 오래전부터 답은 알고 있었다. 내가 수백 번을 하고 다닌 말이니까.


'는 부모를 비추는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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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의 빚 때문에 다투고 잠시 연락을 끊었다가 시어머니를 1년 만에 다시 만났을 때, 어머니께서 내 손을 꼭 잡고 하신 말씀이 있었다.


"꽃님아, 고맙다. 내가 너를 평생 아끼며 살게."


그 후로 어머니는... 어떠셨지?


연년생 둘째를 낳고 머리가 빠지고 기력이 없어 우울했을 때 어머니는 나를 불러 한의원에 데려가 보약을 지어주셨다. 그날 감사해서 엉엉 울었다.


배추 농사를 지으시는 이모님(어머니의 언니) 덕에 매년 크게 김장을 하시면서도 지금까지 한 번도 부르신 적이 없었다. 나에게 부담이 될까 봐 '이번에 언제 김장할 거야.'라는 말 대신 "꽃님아, 이번에 김장했어. 내일 김치 도착할 거야."라고 하셨다.


공황장애가 시댁 탓인 것 같다며 가기를 꺼려했을 때, 설이고 추석이고 갑자기 불참하며 남편과 아이들만 보내도 "꽃님이가 좋아하는 꽃게 보냈다."라며 가장 큰 꽃게를 돌아오는 남편 편에 보내주셨다. 혼자 제사를 준비하실 어머니께 너무 죄송해서 전화조차 드리지 못한 날에도 한결같으셨다.


"어머니 요새 너무 힘들어요."라고 말하면 "너희가 너무 없이 시작해서 그래. 내가 해준 게 없어서 미안해."라고 답하셨다.


좋은 직장에 다니는 남편과 아가씨에 비해 아르바이트만 전전하는 나에게


"꽃님아, 니가 너희 집 태양이야. 니가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거야. 잘 먹고 힘내!"라고 하셨던 말도 기억이 난다.



나는 ...  앞에 썼던 글들처럼, 친구들이나 주위 사람에게 어쩔 수 없이 내 형편을 이야기하게 될 때면


<우리가 이렇게 어렵게 시작해서... 심지어 시아버지 빚도 갚아드려야 했고... 그래서 ... 공황도 앓고... 아직도 이렇게....어려운거야.> 라고 얘기했다.


항상 나는 피해자이고, 어렵게 시작해서 지금도 어려울 수밖에 없는 거라고, 시아버지의 10년 전 실수를 방패 삼아 내 처지를 합리화하고 있었던 거였다.


재정적으로 친정보다 어려운 시댁을 은근히 무시하고, 나의 행동은 대부분 현명하고 옳다고 생각해 왔던 시간이 되감기 버튼을 누른 것처럼 머릿속을 스쳐가자 부끄러움에 울렁거렸다. 나는 너무 교만했고, 이기적이었고, 피해자라는 생각으로 나에 대한 나의 불만을 감추려 했다.


내가 우울했던 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잘하고 싶은데, 나도 능력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남편 회사의 동료들과 동료들의 아내들처럼 내가 웬만큼만 벌었어도 이 정도로 힘들진 않았을 텐데. 남편도 그렇게 생각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열등감과 자괴감을 남 탓으로 돌리고 있었던 거다.




이런 나를 남편과 시어머니가 모르셨을까?



어머니는 10년이 넘는 세월을 그냥 기다려주셨다.



자주 우울해하고, 마음에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있어서 사소한 말에도 쉽게 상처받고, 예민하고, 공황장애로 힘들어하고, 피해자라는 생각에 갇혀 당신을 원망하고 피하는 며느리를. 건드리면 톡 하고 터져 버릴 것 같은 상처 많은 금쪽이를. 묵묵히 되돌아오는 것 없는 사랑으로 지켜보고 계셨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눈물이 쏟아졌다.




"언니, 이제 우리 집은 내가 책임질게요. 잘 살기만 해요."라고 말했던 아가씨도 생각났다. 아마 힘든 일 안 좋은 일은 혼자 해결해 왔을 거다. 짐작은 하면서도 두렵고 괴로워서 묻지 않았었다. 각자 제 코가 석자니까. 그냥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하며 살다가 가족 행사 때 만나 맛있는 거 먹고, 좋은 이야기만 하며 헤어지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아가씨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일인칭 시점의 주인공으로 살면서 내 아픔 외의 다른 것들은 보려 하지 않았던 날들이 너무 부끄러웠다.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따뜻한 작가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거침없이 밝히며 살아왔던 시간들도 얼굴이 화끈할 만큼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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