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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십편 Sep 29. 2023

명절 아침에 생긴 일

< 시아버지의 설거지 >


우리 시댁은 아주 가부장적인 시댁이다. 시할아버지, 시할머니, 시부모님과 남편, 아가씨 이렇게 삼대가 살던 시절엔 아주 그랬고, 시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시할머니께서 작은 아파트를 마련해 따로 살게 되면서 조금 누그러졌다고 한다.


특히 며느리(나)를 맞이 한 시점에 가세가 완전히 기울고 집안의 가장이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에서 아가씨와 어머니로 바뀌며 아버지의 목소리는 힘을 많이 잃었다. 그래도 남편과 내가 신혼여행 마치고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전화하셔서 "지금 그 길로 당장 시할머니댁으로 가서 뵙고 인사드려라."라고 하셔서 나를 놀라게 하시기도 했었, 아직본인의 아내를 "애미야." 라고 부르신다. 제사를 안지내면 하늘이 두 쪽 나는 줄 아시는 것도 여전한 부분이다.


시할머니께서는 제사상 앞에서 어리버리 하는 나에게

"얘, 꽃님아, 너는 제사 지내는 것은 본 적이 없지?"하셨지만

(우리 아빠가 막내인 걸 아셔서, 혹은 전통이 없는 집으로 보셨는지)


그렇지 않다. 우리 아빠가 막내라도 격식 있는 제사를 지내는 집안의 막내라 마산까지 열다섯 시간 걸리던 시절에도 꼬박꼬박 내려가 제사 돕는 엄마를 보아 왔다. 그 제사야 말로 진짜배기로, 바닷가 특유의 향토 음식까지 추가하여 상다리 휘어지게 차렸으며, 어린이들은 병풍 뒤 한 방에 몰아 두고 여자들은 부엌에 모여서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가부장적인 제사였다. 문중의 사촌들 간에 제사 지내는 시각을 달리해서, 우리 큰 아버지네서 제사가 끝나면 남자 어른들과 나의 동생을 포함한 남자들은 우르르, 사촌 집에서 집으로 절을 하러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제사가 이번 추석부터 완전히 없어져 아빠도 이제 고향에 내려가지 않는다고 하셨.)


그런 내가 보기에 시댁에서 차리는 제사상은 아주 약식 제사상으로 보였지만, 차리는 사람이 어머니 혼자 뿐이 이것도 보통 일이 아닐뿐더러 나는 결코 물려받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제사에 관한 지식은 아무것도 전수받지 않고 충성스러운 설거지 병정으로만 지내는 중이었다. 명절에 아프다고 종종 빠지기도 하는 병약하고 의지 없는 손주 며느리를 보고 시할머니께서도 손주에게 받을 제사에 대해서는 포기하신 것 같아 보였다. 어쨌든 어머니께서 제사를 지내시는 동안은 열심히 설거지라도 할 생각으로 돕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이번 명절에도 설거지 병정으로 마음 무장을 하고 (사실 남편을 끌어들여 함께 한다.) 열심히 움직인 하루가 저물었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시댁 식구들의 조촐한 파티 타임이 것이다.


미식가에 애주가인 시댁은 막입에 술을 못 마시는 내가 커온 가정과 문화가 많이 다르다.


여행할 때를 제외하고 내 집이 아니면 에너지가 바닥나 결혼 후 친정에서 조차 단 하루도 자고 온 적이 없는 내게 명절마다 시댁에서 1박 2일을 지내는 일은  번번이 기운 달리는 도전이다.


그래서 명절 제사 전날 밤 10시는, 시댁 식구들은 아가씨가 여행지에서 구해온 희귀한 치즈나 와인, 소고기 등 맛깔난 안주와 술을 꺼내기 시작하는 시각이고

나는 다 씻고 어른들께 인사드리고 침대에 쓰러지는 시각이다. 처음엔 아이들도 품고 재우려고 애썼지만, 나 빼고 모두 아이들을 억지로 재우는 걸 원치 않는 같아서 포기하고 오히려 편하게 혼자 잠자리에 든다.



어젯 밤에도 아침이 되면 밤 사이 야식 파티를 한 설거지가 잔뜩 쌓여 있겠지, 일찍 잔 탓에 일찍 일어나는 내 몫이겠지 하며 공황 약을 봉을 먹고 꼴까닥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날이 밝았다. 아직 알람이 울리지 않았으니 아침 7시 이전인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과연 새벽 6시 20분경이었다.


밖에서는, 시아버지가 시할머니께 인사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어머니, 푹 주무셨어요?"


목소리를 조금도 낮추지 않고 부러 크게 내는 소리. 우렁찬 목소리로 아버지는 할머니를 살뜰히 챙기셨다.


으...... 나는 조금 더 자고 싶어 못 들은 척을 했다. 어차피 방문이 굳게 닫혀있으니까. 하지만 곁에서 자고 있던 첫째가 눈을 번쩍 뜨더니 벌떡 일어나 내 볼에 입을 쪽 맞추고는 문을 벌컥 열었다.


"할아버지~~"


아뿔싸. 나는 속으로 다급하게 외쳤다.


'딸! 제발, 제발, 문! 문 닫아!' 


다행히 첫 째가 문을 닫고 나갔다.


이미 다시 잠들 수는 없었다. 감각들이 깨어나며 화장실이 간절해졌기 때문이었다. 이 방에 화장실도 딸려 있지만 인기척을 조금도 내고 싶지 않아 꼼짝없이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조금씩 흘러갔다.


아버지는 이제 밖에서 헛기침을 하시기 시작했다. 나는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피곤해 또 가만 누워 눈만 깜빡였다.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배 안 고프니? 계란 프라이 해줄까?"


이 정도 데시벨이면 제일 먼저 잠자리에 든 내가 못 들을 리 없다고 생각하시리라. 아버지는 아이들을 불러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들아 양치는 일어나자마자 하는 거야. 그래야 개운 하다고. 한 명은 저쪽 화장실에 가서, 한 명은 이쪽 화장실에 가서 양치하렴."


"네!"


첫째가 다시 문을 벌컥 열고 양치하러 들어왔다. 아이가 양치하는 동안 방문이 열려 있어서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자는 척을 했다. 다시 첫째가 갈 때 문을 닫고 나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첫째는 내겐 관심이 없는 듯 지나쳐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오, 첫. 매너의 재발견!


하지만 화장실이 급박해지자 결국 체념하게 되었다. 일어나자. 핸드폰을 보며 꼼지락 거리는데 얼핏 여자 목소리와 함께 주방 수전의 우렁찬 물소리와 덜그럭 거리는 그릇 소리가 들렸다.


'헉! 어머니가 나오셨나 봐. 안돼, 어머니 설거지 절대 못하게 지켜드려야 해!'


설거지만큼은 어머니 대신 내가 하겠다는 게 어머니에 대한 나의 신조였는데.

(우리는 처음부터 다정한 고부 사이가 절대 아니었다. 앞의 글들에서처럼 다툰 시간도, 짧게나마 절연을 한 시간도 있었다. 조금씩 아주 느리게 마음을 열게 되었고, 어머니에게 연민을 시작으로 존경과 사랑이 생기자  많은 불편도 어머니를 위해서 조금 참을 수 있는 정도까지 왔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불을 제치고 벌떡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가 볼일을 보고 서둘러 세수와 양치를 했다. 뛰어 나가려는 데, 앞머리가 물에 젖어 달라붙은 꼴이 도무지 봐줄 수가 없었다. 시할머니가 자꾸 꽃님이 예쁘다 예쁘다 하시기에 은근 신경이 쓰였다. '이대론 안돼.'


어머니 화장대에서 드라이기를 찾는데 드라이기는 없고 이상한 물건이 보였다.



앞머리 전용 고데기 인가? 하며 전원을 켜고 세모 버튼을 누르는 순간! 위이잉 하며 롤러가 아주 적당한 속도로 회전했다.


세상에! 이런 물건이 있다니. 이게 말로만 듣던 다이O 에어랩? 하며 상표를 읽어 봤는데 그건 아니었다.


뜨끈한 열도 나고, 다른 세모를 누르면 엉킬 뻔하다가도 반대로 작동해서 스르륵 풀렸다. 신기하고 신통한 나머지 세모 버튼을 앞으로 뒤로 조종하며 환상적인 앞머리 고대기에 감탄했다. 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절대로 일부러 시간을 끈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앞머리 손질을 마치고 나갔을 때, 주방에 서서 설거지를 막 마치고 손을 털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시아버지셨다.







너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아버지, 설거지를 하셨어요?!"

"허허, 그래. 애들 우유 주려고 하는데 컵이 없어서."


아버지께서 명절에 설거지를 하신 것은 그분 일생 처음 있는 일. 당연히 나도 처음 보는 일! 나의 호들갑에 어머니도 눈을 부비며 나오셨다.


어머니도 나처럼 놀라는 반응 이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놀랄 일이 하도 많아 이제 웬만해선 놀라지 않는 어머니는 의외로 덤덤하셨다. 표정이 없다는 표현이 맞을까? 어쨌든 나는 기뻤다!

명절 아침마다 돈 버느라 피곤한 남편과 아가씨는 쿨쿨 잘 동안 이른 아침 야식 설거지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인 상차림과 어마어마한 설거지까지 쉴 새 없이 이어져 가는 명절 루틴에서 새벽 설거지가 빠진 것이니까.


세월을 따라 세상도 나도 많이 변했지만, 절대 변치 않을 것만 같았던 시아버지도 변하셨다. 모두 서로를 위해 조금씩 더 노력하는 것 같았다. 또 한편으로는 아버지 본인이 원하는 것이니(제사)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존속을) 두 팔을 걷어붙이신 모습이 다른 사람의 희생만을 강요하던 예전과 달리 순리에 맞는, 당연한 이치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아이들은 작은 손으로 제기에 대추와 밤을 쌓았고 뒤늦게 일어난 남편은 열심히 쟁반으로 제기를 날랐고, 어머니는 가스불 앞에, 나는 싱크대 앞에 서서 움직였다. 아버지는 늘상 하시던 대로 제사상을 펼치셨고, 우리 아가씨는 늘 하던 대로 제일 늦게 일어나 강아지를 안고 소파에 앉아 있었지만,


아가씨는 우리 시댁의 생명줄, 막대한 무게를 짊어진 가장이니 (게다가 순환직으로 먼 지방에서 올라왔으니) 무리하지 않도록 쉬게 해야 한다는 가족들의 무언의 협의에 나도 끄덕끄덕 동의한다. 남편이 설거지를 함께 하면서부터 내 마음이 조금 넓어졌다.


대신 아가씨는 제사 후 식사 자리에서 예쁜 말을 한다.


"이거 이거 들어간 노력에 비해서 먹을 것도 없고. 다 남기고 버리고, 엄마 힘들어서 며칠 앓고. 이제 제사를 없애야 한다고."


이 말도 수 년째이지만 할머니와 아버지 앞에서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도 아가씨뿐이니까! 나는 속으로 또 끄덕끄덕.


그렇게 복닥복닥 놀랍고 신기하고 분주했던 명절 아침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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