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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옥수수 Nov 26. 2023

라면을 부숴먹는 남편의 심리

살은 빼고 싶지만 라면은 먹고 싶어

남편을 이해하려는 노력 덕분에 1년에 한 번 먹던 라면이랑도 많이 친해졌다.

좋아하는 찌개 밥상이 아니고 남편이 좋아하는 라면, 떡볶이를 자주 먹었다.

하지만 남편은 진정 분식의 고수였다.

라면은 물 붓고 끓여 먹는 게 전부가 아닌 음식이란 걸 알려주었다.


이처럼 우리 부부는 라면 하나 먹는 방식도 달랐다.

일단 남편은 라면을 끓여 먹는 것보다 '부숴 먹는' 횟수가 더 많다.

끓여 먹는 게 귀찮아서 부숴먹고,

끓여 먹으면 나오는 설거지가 귀찮아서 부숴먹는다.

살찌는 거에 민감한 남편의 논리로는 끓여 먹는 것보다 부숴먹는 게 살이 덜 찐단다.


귀찮고 살이 덜 찌려고 라면을 부숴먹는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남편의 심리였다.

애초에 살이 찌는 게 걱정이 되면 라면 근처도 가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살은 빼고 싶지만 라면은 먹고 싶어

남편은 본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마디를 덧붙인다.
"역시 살이 찌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 같아"
본인도 문제는 알고 있다는 자기변명의 말.


나는 참 아재음식을 좋아해서 그런지 청소년 때나 라면을 부숴먹지 누가 부숴먹나 했다.

군인 때 라면땅을 자주 먹었다는 이야기 정도에만 끄덕끄덕.

라면을 부숴 먹는 건 그저 장난 같은 음식, 어릴 때나 먹던 음식이라는 인식이 컸다.


남편은 살찌는 온갖 음식을 좋아하고 성실하게 섭취한다.

라면, 떡볶이, 치킨, 피자, 햄버거...

좋아하는 음식이 다 살찌는 음식이니 본인도 얼마나 힘겨울까 싶었다.




한 번은 같이 라면을 끓여 먹자던 점심이었다.

봉지라면 5개를 전부 끓여가지고 온 남편이었다.

너무 놀라서 왜 이렇게 많이 끓였냐고 물었다.


"라면 끓일 때 보통 3,4개는 끓여 먹지 않아?"

오 마이 갓!

남편의 라면 1인분은 기본이 3봉지였기에 끓여 먹으면 제대로 살이 찌는 지름길이었다.
그제야 라면을 부숴먹는 게 살이 덜 찐다고 주장한 남편의 심리를 조금 알게 되었다.


이밖에도 남편은 희한한 라면 기술(?)을 많이 보여줬다.

사리곰탕이나 비빔면 같이 내 기준에선 라면의 범주에서 약간 벗어난 라면들도 잘만 부숴먹었다.

끓여 먹을 때는 찌개용이라고만 생각한 뚝배기에도 자주 끓였다. 일반 냄비보다 라면 기름때가 잘 씻긴다며 대단한 비밀을 알려주듯 말하며 좋아하던 남편이었다.


찌개에 한 상 차려 먹는 것만 밥상인 줄 알았던 내가 많이 변하고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정말, 가깝고도 먼 당신이었다.

밭에서 기른 쌈채소와 제철나물, 자극적이지 않은 양념으로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밥상.

나의 취향은 남편과 정반대다.


오늘도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 한 번에 3,4 봉지를 끓여 먹고 저녁을 패스하는 남편.

설거지도 최소화하기 위해 뚝배기에 라면을 끓이는 걸로 부족해 자주 부숴먹는 남편.


서로 다른 밥상, 서로 다른 우리.

앞으로 우리의 밥상은 괜찮을까?

앞으로 우리의 부부관계는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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