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옥수수 Apr 07. 2022

봄이라서 우울한 적 있으세요?

이상한 게 아니더라고요

인생에서 바닥을 쳤을 때 여기 옥탑방에 왔다.

예쁜 공간에서 화도 스트레스도 즙짜듯 쭉쭉 짜내고 있던 어느 봄날이었다.

나를 가장 괴롭게 했던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 이어폰에서는 신나는 음악과 발라드가 랜덤으로 흘러나왔다. 토요일 같은 설레는 햇살에 얼굴이 발그레해지면서 마음까지 포근해지는 완연한 봄이었다.


봄이기 때문에

그런데 너무 쓸쓸했다. 이상하고. 햇살 때문일까? 음악이 문제인가?

며칠 뒤 우연히 읽은 글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봄인데 우울한 감정이 드는 이유는 '봄'이기 때문이었다.

필사해서 소중히 덮어뒀던 노트를 봄이 되어 다시 펼쳤다. 김현 시인의 잡지 기고글 '봄을 사용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일부분을 소개한다.


봄에 맛보는 따뜻하고 쓸쓸한 상념

묵은 감정의 찌꺼기들을 깨끗이 치워버리고 싶은 계절, 어김없이 봄이다. 봄에는 일찌감치 마음속 대청소를 하고 싶어 진다. 어떤 이는 비질 한 번으로, 어떤 이는 쓸고 닦는 일로는 모자라 마음을 꺼내 세탁하게 된다. 담아두기 힘든 말들이 넘쳐나는 이즈음, 단 한 가지 분명한 위안은 역시 바뀌어야 할 것은 바뀐다는 사실. 그것이 계절뿐이라도.


산책하다가 찍은 벚꽃나무


계절뿐이라도 바뀌어야 할 것은 바뀐다 

괴롭던 회사생활을 접기로 결정 내리기까지는 계절을 느끼지 못했다.

세 번의 봄이 지났지만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길을 걸으며 내 마음은 내내 겨울이었다.

그래도 한 숨 한 숨 내뱉고 발을 움직이니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리지만 가고 있었다. 여름이 되어서야 봄을 느꼈지만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고통의 파도는 가장 높은 지점을 찍고 나서야 잔잔해진다.

부서진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는 새로운 물결이 만들어진다.

봄인데 나만 우울한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가?

우울해도 괜찮다. 바뀌는 것이 계절뿐이더라도 결국엔 바뀌니까 말이다.


모조리 꺼내어 세탁하고 싶은 계절, 봄

묵은 감정을 털어버리려면 제일 먼저 빨래를 해보라.

건조기 대신 탈수된 세탁물을 탁탁 털어 옥상이나 베란다에 널어보자. 

볕이 잘 드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좋다.

무거웠던 빨래는 이내 물기 없이 바짝 마르면서 가벼워진다.


빨래를 열 번 했다고 해도 우울한 채로 여름을 맞게 될 수도 있다.

변화하고 싶지만 변화하기 힘든 삶 속에 있다면 계절 요정에게 다리 하나 걸치자.

그냥 올라타는 것이다.

여태 애쓰고 노력했으니 쉽게 가보기도 하자.


옥상 빨래는 봄이 제격입니다


마음이 자꾸만 울려고 한다면 봄이 시작된다는 신호

찬란한 햇살이 벅차서.

흩날리는 벚꽃 잎이 너무 아름다워서.

따뜻한 공기가 너무도 위로가 돼서 마음이 자꾸만 울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꽃은 피고 계절은 바뀌었다.

나는 멈춰있는데 계절은 바뀐다고 생각했지만 내게도 봄이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몸과 마음으로 흠뻑 느낄 수 있는 봄이 오기까진 꽤 걸렸다.

빨래를 해도 해도 마음에는 따로 소독이 필요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다양한 취미를 만들었다.

사랑하는 반려견을 자주 봤고 가족, 친구들과 여행도 다녔다.

언제나처럼 어느 날이었다. 마음이 울랑 말랑 울컥울컥 한 게 점점 흐릿해지더니 '진짜 봄'이 왔다.

 

우리 집 화단에 찾아온 봄


나를 봄으로 데려갈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우리 집에는 집주인 내외만큼 따뜻한 화단이 있다. 

매년 거르지 않고 꽃망울을 터뜨려주며 기분 좋게 해주는 화단.

나를 살려준 데 큰 몫을 한 집이지만 여기에서도 공짜로(?) 봄을 느낄 수는 없었다.

세탁하며 미소 짓다가도 우울감이 심해질 때면 펑펑 울며 감정을 뱉어내는 날들이 한동안 지속됐다.


봄이면 신나 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언젠가는 흠뻑 신나리라 다짐했다.

다시 태어났다고 여기며 새로운 인생을 상상했다.

후회와 아쉬움이 밀려와도 동네 산책을 하며 계절을 느꼈다.

척이라도 하면 진짜로 그렇게 되겠지 하면서. 


아름다운 우리 동네. 아름다운 우리네 인생

봄이 올 때가 돼서 온 것

20대 때는 에너지 넘치고 파이팅 넘쳐서 참 열심히도 살았었다. 돌이켜보니 찬란히 꽃피는 내 인생의 봄날을 기다리며 달리기만 했다.

환상이란 것이 깨지고 극심하게 우울했던 시절을 지나와 봄을 바라보니, 내 인생은 계속 봄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괴로운 일도 기쁜 일도 모두 그때에 맞춰 찾아왔다는 사실. 봄이 아닌 적이 한순간도 없었다.


요즘은 동네가 참 아름답다.

벚꽃과 진달래, 개나리가 만개한 풍경. 들뜨고 신나는 걸 보니 제대로 봄을 맛보고 있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내년 봄은 달라질 수 있다.

봄이라서 우울한 감정이 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주저하지 말고 빨래를 해야지.

이전 06화 18년째 고양이 트라우마를 안고 삽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