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동굴 안에서 나온다
플라톤에 따르면, 교육받는 우리 모두는 ‘철학자’이다. 철학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학교의 교육과정은 각각 교과목의 개성보다는 모든 교과목을 통틀어서 하나로 바라보는 총체에 가깝다. 학교 교육과정에 존재하는 여러 과목은 그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그들이 학생들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은 모두 하나의 세계의 의미를 깨우치기 위함이다. ‘가지계’와 ‘가시계’라는 두 세계를 이용해 비유하자면, 교육받는 자가 ‘가시계’라는 지식의 세계에서 ‘가지계’에 존재하는 ‘좋은 것’을 얻기 위한 노력이 바로 교육의 과정이다. 순수한 본질을 얻기 위해 본질을 구현하는 ‘실천’ 또한 교육의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론>에서는 ‘태양’, ‘선분’, 그리고 ‘동굴’이라는 세 단어의 비유를 이용해 철학자가 국가 통치를 위해 필요한 자질을 탐구한다. 통치자, 즉 군주가 갖추어야 하는 철학자의 자질은 ‘좋은 것의 형식에 관한 지식’이다. ‘좋은 것’은 원형이며, ‘태양’은 그 ‘좋은 것’의 모사이다. 우리는 ‘태양’을 통해 지식과 진리를 파악할 수 있지만, ‘태양’을 통해 지식과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지식과 진리가 좋은 것이다’는 공식을 성립시키지 않는다. ‘좋은 것’은 지식과 진리의 위에 존재하는 상위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좋은 것’이란 무엇인가? 플라톤은 ‘좋은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즉 다른 말로, 존재하는 것의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실재’는 모든 것의 최상의 개념인 동시에 모든 것의 원인이다. 이는 동굴 안에서 죄수가 바라보는 빛이 나오는 ‘원천’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의 인과관계를 따질 때, 시간의 방향과 시간의 흐름을 고려한다. 그렇지만 시간의 흐름상 빛의 형식 이전에 빛이 존재할 수 없으므로, 빛의 인과관계는 빛이 시작하는 ‘원천’인 ‘좋은 것’의 이전부터 시작한다. ‘좋은 것’이 존재하기 이전에, 그리고 ‘빛’나기 전에 ‘좋은 것의 형식’이 선행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쇠고랑을 찬 죄수가 진짜가 존재하는 밖으로 나오는 과정도, 시간의 순서에 입각한 하나의 교육과정이다. 모두가 그림자를 보고 진짜라고 믿을 때, 홀로 걸어 나와 진짜를 봤음을 그의 동료 죄수들에게 알리는 것 또한 ‘가시계’에서 ‘가지계’로 나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 때 처음 진짜 모습을 본 죄수가 ‘좋은 것의 형식을 보았음’ 또한 자명하다. 이 때 ‘좋은 것의 형식에 대한 지식’은 교육의 분야에서 모든 지식의 기초가 된다. 모든 지식을 포괄하는 기초가 될 수 있기에 우리는 그를 ‘지식의 순수한 본질’이라고 부를 수 있다.
진짜 모습을 본 죄수, 그리고 그가 진짜를 봤음을 동료 죄수들에게 알리는 것,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동료 죄수들이 쇠고랑을 풀고 밖으로 나가는 것은 ‘좋은 것의 형식’을 동경하는 행위임인 동시에 그림자가 아닌 좋은 것으로 ‘몸과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동굴’이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이 중심인 우리의 삶이라면, 동굴 안에 있는 죄수들은 바로 우리들 자신임을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즉, 사람이라면 모두 동굴 안의 죄수로서의 삶을 과정으로서 거치며, 이는 철학자로 명명되는 ‘교육받은 사람’,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철학자-군주’ 또한 마찬가지이다.
‘철학자-군주를 위한 교육과정’은 앞서 말한 ‘동굴의 비유’에서의 쇠고랑을 풀고 진짜를 보는 것으로 대표되는 일인 ‘가시계’에서 ‘가지계’로 몸과 마음을 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좋은 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빛이 나오는 원천이 존재하기 위해서 좋은 것의 형식으로 나아가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철학자(교육받은 사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를 길러내는 ‘철학자-군주’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철학자-군주’를 만드는 것은 바로 동굴에서 그림자와 진짜 중 진짜를 구별해내는 경험이며, 그를 동료 죄수들에게 가르쳐 ‘철학자’를 만드는 경험이다. 그 경험은 어둠 속에서 다른 이의 삶을 이끄는 ‘빛’이며,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행복의 실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