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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Aug 08. 2023

온유의 자리

4. 새로운 바람

   집에 도착하니 엄마가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잘 다녀왔니? 간식 먹자.” 

   “네.”

   나는 손을 씻고 옷도 갈아입고 앉았어요. 엄마는 우유 한 컵과 카스텔라 한 조각을 내어주고, 흐뭇한 얼굴로 내가 먹는 걸 지켜보았어요. 

   “우리 온유는 천천히 먹어서 좋아. 누나 봐, 매일 급하게 먹다가 사래 들고 체하잖니.”

   나는 빵을 우물거리며 말했습니다.

   “응···, 그런데 반에서는 내가 제일 느린 것 같아.” 

   “그래?”

   “그리고 말도 잘 못하는 거 같고.”

   “에이, 말수야 적은 사람도 있고 많은 사람도 있지. 다들마다 달라.”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엄마 표정이 걱정스럽게 바뀌더니 물었습니다. 

   “잠깐, 온유 무슨 일 있었니?”

   “아, 아니야, 그냥 그렇다고.”

   내가 고개를 가로젓자 엄마는 안심한 듯 싱긋 웃었어요. 

   “넌 천천히 하니까 실수도 덜하고 꼼꼼하잖아. 좀 느려도 괜찮아. 엄마도 어릴 땐 너처럼 느리고 내성적이었어. 그럼 어때? 안 그러니?”

   익살스럽게 어깨까지 으쓱하는 엄마를 보니 웃음이 나왔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엄마처럼 생각해주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특히 반문수와 배서인 말이에요.

   엄마가 물었습니다.

   “친구들이 뭐래? 슈퍼마리오 보고 잘 만들었다고 하지?”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어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너처럼 이렇게 만든 친구 또 있어? 취미가 같은 아이가 있으면 더 재미있을 텐데.”

   엄마 말에 헤헤 웃기만 할 수밖에 없었어요. 

   엄마는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일어나 빈 접시를 정리했어요. 나는 가방을 들고 방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슈퍼마리오를 가방에서 떼어냈습니다. 

   ‘종일 주머니 속에 있어서 아무도 못 봤을 거야.’ 

   나는 까치발로 서서 서랍장 위에 놓인 커다란 종이상자를 꺼냈습니다. 디폼 블록으로 만든 동물들과 짱구, 로봇 같은 캐릭터들이 잔뜩 있지요. 얼마 전부터 열심히 만든 것들이에요. 블록을 조립하다보면 시간이 뚝딱뚝딱 잘 흐릅니다. 걱정스러웠던 생각도 들지 않아서 좋아요. 나는 블록 조각을 집어 슈퍼마리오를 하나 더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아침도 발걸음이 늘어졌습니다. 수, 목, 금···. 토요일 이 되려면 삼일이나 남았어요. 그때 뒤에서 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어요.

   “안녕!”

   “어! 아, 안녕! 지금 가?”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민지를 보니까 그래요. 

   “많이 더워?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민지가 놀란 듯 물었어요.

   “어? 어어. 아까 뛰어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 나와 버렸어요. 방금 집에서 나왔는데 그걸 민지가 모를 리 없잖아요. 괜한 거짓말쟁이가 되고 싶지 않아서 솔직하게 말했어요.  

   “사실은··· 학교 가는 길에 널 만난 게 처음이라 좀 놀랐어.”

   그러자 민지가 부끄러운 듯 혀를 살짝 날름거렸어요. 

   “내가 잠이 좀 많거든. 엄마가 늦잠 고치래서, 이제 이 시간쯤에 나올 거야.”

   “아,” 

   의외였어요. 날쌘 민지와 늦잠꾸러기는 어울리지 않았거든요. 내 표정을 본 민지가 덧붙여 말했어요,

   “히, 난 일어나면 쌩쌩한데, 잠깨기가 너무 힘들거든. 엄만 내가 나무늘보 같대.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게 잔다고.”

   “하하, 나무늘보라니.”

   생각지 못한 말에 웃음이 터져버렸어요. 

   우리는 나란히 걸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긴장이 되었어요. 온갖 생각을 하며 곁눈으로 민지를 살짝 보았어요. 연두색 티셔츠가 싱그러운 초록 잎사귀처럼 잘 어울립니다. 새로운 초여름 바람까지 부는 것 같습니다. 괜히 두근대는 심장 소리가 민지에게 들릴까봐 걱정되었어요.

   민지가 휴대전화를 만지작대더니 음악을 재생시켰어요. 

   “이 노래 알아? 난 요즘 만날 이것만 들어.”

   민지 목소리만큼이나 경쾌하고 신나는 선율이 흘러나왔어요. 아, 최근에 많이 들었던 아이돌 노래입니다. 내가 후렴구를 따라 살짝 흥얼거렸어요.

   “어? 온유 너도 이 노래 좋아하구나!”

   민지가 놀라며 반겼어요. 

   좋아한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민지는 흥이 난 듯 손짓 발짓을 하며 춤추는 시늉을 했습니다. 

   “이 노래로 애들이랑 춤 연습도 하기로 했거든. 너도 할래?”

   “어? 아니야, 난 춤은 춰본 적도 없어.”

   나는 손사래를 쳤어요. 

   “그래? 뭐, 상관있나? 이제 해보면 되잖아.”

   민지는 박자에 맞춰 연신 춤추듯 했습니다. 꼭 화려한 나비 같아요. 공중에 뜬 것 마냥 내 걸음도 가벼워집니다. 지루했던 등굣길이 벚꽃 깔린 길처럼 환해졌어요. 

   횡단보도를 건너며 민지도 블록조립을 좋아하는지 물으려 할 때였어요. 버스 정류소에서 한 남자가 전력질주하며 뛰어오는 게 아니겠어요.

   “어! 뭐야?”

   민지가 깜짝 놀라 외쳤고 나도 걸음을 멈췄어요.   

   “내 가방이에요! 내 가방!”

   정류소에서 학생 형이 큰 소리로 외치며 발을 동동 굴렀어요. 여드름 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어요. 그 사이에 남자는 빛의 속도로 우리 곁을 스쳐지나갔어요.  

   “에구, 어쩌니! 저, 저 나쁜.”

   “거기 서!”  

   그때였습니다. 누군가가 도망간 남자를 쫓았습니다. 뒷모습이 낯이 익어서 놀랐습니다. 더벅머리에 추레한 옷차림의 정류소 아저씨입니다. 아저씨는 가방을 채어간 남자보다 빨랐습니다. 

   “세상에, 대단하다.”

   민지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어요.

   나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울상이 되었던 학생 형의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누군가가 신고했는지 곧 경찰관 두 명이 도착했어요. 학생 형은 정류소 아저씨에게 연거푸 인사했지만 아저씨는 별 대꾸도 없이 유유히 걸어갔습니다.  

   한바탕 소동에 유나짱도 가게 밖으로 나와 지켜보고 있었어요. 구경하던 사람들도 자신이 기다리던 버스가 오니 하나둘 자리를 떠났지요. 

   민지 휴대전화에서 노래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어요. 내 심장은 또 다르게 뛰었습니다. 살아있는 느낌이 들지 않는 사람, 좀비 같던 아저씨 때문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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