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림보 림보 느림보
새로 생긴 시청각실은 사방이 하얗고 네모반듯합니다. 바닥은 반들거렸고 커다란 창에 긴 암막 커튼이 드리워져있어요. 시청각실 뒤편 모퉁이에 빨간 방석들이 탑처럼 차곡차곡 쌓여있었지요.
“다들 좋은 아침이야. 자, 방석 하나씩 가져와서 바닥에 앉아요.”
선생님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오며 말했어요.
“네에!”
아이들이 신나게 방석 탑으로 몰려들었어요. 바닥이 쿵쿵 울려댔지요. 순식간에 방석들이 사라졌고 한 개만 덩그러니 남았어요.
나는 허리 숙여 남은 방석을 집어 들었어요. 제법 두텁고 묵직했지요.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자리를 잡았어요.
내가 한 무리로 다가가자 서인이가 말했어요.
“여기 혜리 자리인데?”
곧 혜리가 샐쭉한 얼굴로 다가와 폴싹 앉았어요. 하얀 레이스 치마가 넓게 펼쳐졌어요.
“아. 그렇구나.”
나는 내리려던 방석을 끌어안고 한걸음 뒤로 물러났습니다. 옆을 보니 서인이와 다른 친구들 사이에 공간이 또 있었어요. 내 방석이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이었지요.
“여기는 앉아도 되지?”
그랬더니 서인이가 그리로 발을 쑥 뻗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어요. 그리고는 콧김을 큼큼 불어댔습니다.
“여기 내가 미리 맡아둔 자리거든!”
“어, 어, 그래.”
하는 수 없이 방석이 쌓였던 모퉁이 근처로 돌아왔어요. 빈 공간이 덩그랬어요. 방석을 내려놓고 앉으니 엉덩이 아래 찬 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지요.
아이들의 뒤통수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고슴도치처럼 뾰족뾰족 솟은 서인이의 머리, 넓대대한 반문수의 뒤통수, 총총 땋아 내린 여울이 머리, 찰랑거리는 민지의 뒷모습···. 익숙합니다. 교실에서도 내 자리는 맨 뒤니까요.
아이들이 와글와글 대는 소리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꼭 나 혼자만 수영장에 잠수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지요. 창가의 바람이 세게 불었습니다. 어쩐지 추운 기분에 어깨를 쓸어내렸습니다.
“오늘과 다음 주 이 시간에는 다큐멘터리를 볼 거예요. 다들 집중해서 보도록 해요.”
조례를 마친 선생님이 교탁 옆에 놓인 커다란 모니터를 켜고 재생 버튼을 눌렀어요.
하늘까지 삐죽삐죽 솟은 나무들과 파릇한 초원이 펼쳐진 아프리카가 나왔어요. 이글대는 태양 아래로 얼룩말, 덩치 큰 코끼리 무리,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사슴 무리가 있었지요. 저 멀리서 사자 한 마리가 사슴들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회갈색 갈기는 풍성했고 매서운 눈은 깜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자의 기세가 으스스합니다. 나는 두 팔로 무릎을 껴안았어요. 뱃살이 허벅지를 눌렀지요.
오랫동안 꼼짝도 않던 사자가 사슴 무리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어요. 놀란 사슴들은 우왕좌왕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사자는 그 중 한 마리를 쫓기 시작했지요. 사슴은 전속력으로 달음박질했어요.
‘빨리 달려, 더, 더!’
나도 모르게 사슴을 응원하게 되었습니다.
사자와 사슴은 갈대숲을 가르고 넓은 개울도 넘으며 쫓고 쫓겼어요. 커다란 바위 근처에 다다르자 사자가 멈춰 숨을 골랐어요. 가슴통이 크게 들썩였어요. 내달리던 사슴도 사자를 살피며 헐떡거려요.
그때 반문수가 선생님 눈치를 살피며 서인이 옆으로 살그머니 건너왔어요. 둘이서 눈빛을 주고받더니 앞에 앉은 여울이의 땋은 머리끝을 쑥 잡아당기는 게 아니겠어요.
“아얏!”
여울이 머리가 맥없이 뒤로 꺾였어요.
“쉿! 크크.”
반문수가 낮게 웃었어요.
“어? 누가 떠들지?”
시험지를 채점하던 선생님이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어요.
문수와 서인이는 재빨리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지요. 선생님이 알아채지 못하자 서로 주먹 끝을 살짝 맞부딪치며 미소 지었어요.
여울이는 울상이 된 얼굴로 뒤를 돌아보더니 입술을 깨물었어요. 갈래 머리끝만 어깨 앞으로 가져갈 뿐이었지요. 이번에는 서인이가 공책 한 장을 주욱 찢더니 잘게 쪼개어 여울에게 던져댔어요. 여울이는 머리를 감싸 안은 채 고개를 숙였어요. 보다 못한 옆 친구가 뒤로 노려보았어요. 반문수와 서인이는 시치미를 때며 키득키득 거렸어요. 어쩌면 저렇게 죽이 잘 맞을까요.
창문이 달캉대는 소리가 커졌어요. 사자는 어느덧 사슴 꽁무니까지 따라왔어요. 결국 사자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사슴 엉덩이를 물고 말았어요.
“윽!”
영상을 보던 아이들이 짧은 비명을 질렀어요. 몇몇은 고개를 돌렸어요. 사자는 갈대 숲 사이로 쓰러져 버린 사슴을 타고 넘었어요. 살아남은 사슴 무리는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어요. 사슴들의 검은 눈이 크게 일렁거렸어요.
‘으, 잔인해.’
무서웠지만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수업 마치는 종이 울렸어요.
“자, 다음 시간에 이어서 보자. 모두 교실로 돌아가요. 방석 제 자리에 두고.”
선생님이 시험지를 바루며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쓰러진 사슴을 비추던 화면도 곧 꺼졌어요. 아이들은 재잘대며 각자 자리를 정리했어요. 여기저기 흩어졌던 방석들이 모여 삐뚤빼뚤 쌓였습니다. 아이들은 줄줄이 시청각실을 빠져나갔어요.
‘저 사슴은 그대로 죽었겠지··· 불쌍하다.’
나도 방석을 올리고 따라 나가려할 때였어요. 방석 탑이 스르르 기울며 쓰러져버렸어요.
“아!”
나는 흩어진 방석을 바루어 차곡차곡 쌓았어요. 이미 다 나간 뒤였으니까요. 다음 시간에도 여기 올 생각을 하니 어쩐지 우울해졌어요. 난 정말 느림보인가 봐요.
그날이 문제였습니다. 지지난 주 체육시간, 나는 반문수와 한편이 되어 피구를 했어요. 경기 마지막 즘에 나, 상대편에는 서인이만 남았습니다.
‘내가 맞으면 우리 팀이 지는 거야.’
나는 잔뜩 긴장된 채로 공을 피했어요. 너무 긴장한 탓인지 동작이 더뎌졌어요. 아니나 다를까, 곧 공에 맞아버렸고 상대편은 환호를 했지요.
“정온유! 너 땜에 졌잖아. 으휴, 이 느림보.”
문수가 내게 버럭 소리 질렀습니다.
“아, 미안해. 너무 긴장이 돼서.”
내가 어쩔 줄 몰라 하자 반문수는 팔짱을 끼며 픽 웃었어요.
그때 느낌이 묘했습니다. 운수의 웃음이 뭔가 싸했거든요. 그 후로 나는 공식 느림보가 되었지요. 처음에는 반문수만 “림보림보 느림보”라 불렀어요.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하고 그대로 넘겼어요. 그랬더니 다른 아이들도 하나 둘씩 따라 부르기 시작했어요. 어느새 나에게 느림보 꼬리가 달려버렸지 뭐예요. 평소 가까웠던 친구들도 데면데면해하더니 다가오지 않았어요. 내가 다가가도 은근슬쩍 피했지요. 겨우 2주 만에 생긴 일이에요.
‘나 때문에 경기에 졌으니까? 내가 너무 느려서일까?’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아직 답을 찾지 못해서인지 내내 갑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