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소밥 05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림은 PainterEUN Oct 26. 2022

생생한 시간의 흐름을 담은 동지 팥죽

계절을 담은


쫀득쫀득한 새알과 팥물 사이사이 밥알이 있어 든든한 한 끼로도 손색없는 동지 팥죽.

 

엄마의 팥죽 레시피를 살짝 공개하자면.

팥죽을 끓이기 전날부터 팥을 물에 담가 불리고, 찹쌀은 팥죽을 끓이기 30분 전부터 불려둔다.

초벌로 팥이 익을 때까지 끓인 후 식혀준다.

식힌 팥을 믹서에 넣고 팥이 잘 갈릴 수 있도록 끓인 팥물도 조금 넣어 곱게 갈아준다.

팥의 쓴맛 때문에 초벌 팥물을 버리고 다시 끓이는 사람도 많지만, 엄마는 그 물을 버리지 않고, 믹서에 간 팥을 다시 초벌 팥물에 넣어 팥죽을 끓이신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 팥죽은 팥 외의 맛이 거의 나지 않는다.

근데 또 그 맛이 쓰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간을 맞추는 엄마의 기술이 좋은 건지, 이걸 먹고 자라나서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이 맛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만 알 뿐.

불린 쌀을 넣고 뜨거운 팥물에 '퐁' '퐁' 새알도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한 후 바닥에 죽이 눌어붙어 타지 않도록 뭉근한 불에 쌀과 새알이 익을 때까지 계속 저어준다.

가라앉아 있던 새알이 동동 떠오르면 새알이 익었다는 뜻이니 불을 꺼주면 된다.


"후후 후릅 촵촵 하‧‧‧ 맛있다."

유난히도 해가 짧은 겨울날. 동지 팥죽을 먹을 때면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러 코끝 시린 계절이 되었나 싶어 놀라곤 한다. 밤이 내린 창밖을 보면 올 한 해 무엇을 이루었나 싶어서 여러 생각에 빠져든다.

계절을 잊고 살다 그제야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몇 해를 이 잠깐의 시간의 흐름조차 잊고 지냈었지.’

다시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된 건 회사를 그만두고도 한참 지난 후였다.

찬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겨울,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대단치는 않더라도 남들처럼, 그들과 같은 길에 나도 같이 올라 헤쳐 나가리라는 마음으로 사회에 뛰어들었다가 몇 해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것이다.

패잔병처럼 힘껏 싸우고도 승리를 끌어내지 못한 씁쓸함을 가득 지닌 채.

잔뜩 쪼그라든 마음과 상처만 안고서.


포기와 체념이 뒤섞인 마음이셨으리라 짐작할 뿐.

나는, 돌아온 나를 보던 부모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저 죄송스러운 마음에 많은 날을 돌아오고서도 주눅이 들어있었다.

집에 왔지만, 예전 같지 않았다.

몇 해를 떨어져 살다 다시 들어선 움직임 하나에 부산스러울까 봐 냉장고 문을 여는 것도, 뭐 하나 내 입에 가져가 먹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다시 돌아온 집에 녹아들지 못하고 얼어붙었던 나를 녹여준 건 다름 아닌 엄마가 끓여준 동지 팥죽이었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동지 팥죽 말이다.


매해 동지, 엄마는 잊지 않고 팥죽을 끓이신다.

덕분에 매년 돌아오는 동지에는 팥죽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집을 떠나고서는 동지에 팥죽을 먹은 기억이 없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다시 봄, 여름, 가을, 겨울 매일 같은 일상을 보내며 계절의 흐름을 잊고 살던 내게 그날의 팥죽은 생생한 시간의 흐름을, 현재를 자각하게 해 주었다.

‘한 해의 끝자락에 와있구나.’

내 앞에 놓인 엄마의 팥죽을 보고서야 나는 집에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겉돌던 우리에겐 서로를 다시 받아들이고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

서로에게 있어 우리의 존재가 달라진 건 아니었다.

가족이 있다는 것에, 돌아올 품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다시 한 해가 동지를 향해 달려간다.

뜨끈한 팥죽 한 그릇에 대한 따끈한 그리움이 벌써 차오른다.



PainterEUN

이전 04화 천의 얼굴 된장찌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