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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은 PainterEUN Oct 30. 2022

낯선 변화

이렇게 달라지는 걸까요.

Photo by Eric Prouzet on Unsplash


'음 이것도 못 입게 됐네? 이건 겨드랑이가 끼고 이건 겨우 끌어올려도 골반이 터질 것 같고 이건··· 또 이건····'


계절이 다르게 몸이 변합니다. 생활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데 말이죠. 한 무더기 옷을 버리고도 미련이 남아 둔 옷이 많지만 왠지 시간만 더 유보했을 뿐 다시 입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사이즈 변화가 두 단계 뛰니 '이것이 나잇살인가.' 체감하게 됩니다. 

체구가 작았던 시기엔 프리사이즈의 크기가 줄어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고 두 손 들고 반겼었는데, 이젠 줄어든 선택지에 '이렇게까지 작게 만들 일인가. 천을 아껴도 너무 아낀 거 아냐?'라는 볼멘소리를 자주 뱉습니다.


사이즈를 줄이는 것보다 큰 사이즈를 구매하는 일이 수월해서일까요? 자꾸 더 큰 거 더 큰 것을 사게 됩니다. 커진 사이즈만큼 편안해진 신체는 다시 옷에 맞게 덩치를 불립니다. 그럼 다시 더 넉넉한 옷을 찾는 사이클에 오르게 됩니다.

요즘은 S, M, L, XL와 같은 대표 사이즈보다 상세 사이즈가 중요합니다. 암홀의 깊이는 어떻게 되는지, 허벅지, 엉덩이 둘레는 어떻게 되는지, 밑위와 총길이는 어떻게 되는지 같은 것들이요. 상세 사이즈를 보지 않고 사이즈가 늘었다고 덜컥 사이즈를 올려 주문하면 다른 이의 교복을 물려받은 것처럼 얻어 입은 느낌이 들고, 오버사이즈로 나왔다고 사이즈를 낮춰 주문하면 신체의 불편함을 감당할 수 없는 불상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상하의의 변화도 다르다 보니 상하의 사이즈를 개별로 선택할 수 없는 세트 상품은 상하의 둘 중 하나의 실루엣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마음을 접어야 할 때도 많습니다.


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전 사이즈 구두는 숨도 못 쉴 정도로 코르셋 끈을 조인 것처럼 발볼과 발등은 압박해 한걸음 내딛기도 힘듭니다. 엄지발가락 뼈가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길이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초원처럼 드넓어진 발은 동산처럼 한껏 솟아오르기까지 해 사이즈를 올려 주문해도 도무지 맞지 않습니다.

벌써 돌려보낸 구두가 몇 번째인지 들어간 반품 비용만으로도 구두 몇 켤레를 소장할 값을 치렀으니 차라리 맞춤 구두를 제작했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사이즈에서만 아니라 삶의 선택지에서도 난관에 봉착한 걸 부쩍 느낍니다.

나를 책임져야 할 무게는 더해졌는데 가정을 이루지도 청년도 아니게 된 저는.

부동산 정책에 소외돼 집을 마련하는 일은 별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지고

'XX년생 이후'라는 구직 정보를 볼 때면 일을 하고 싶어도 직장을 구할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결혼은 선택의 영역이 되어간다지만, 시작부터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동행은 저 하나 감당하기 힘든 저에겐 체념의 영역에 가깝고, 결혼과 출산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우리의 존재가 생물학적 기능만이 다가 아님에도, 건강한 출산이 가능한 나이를 벗어나면 만남에도 주춤거리게 되는 현실이 씁쓸합니다. 

그렇다고 피상적 관계에 마음을 쓰기엔 삶이 더 헛헛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불안을 먹이로 커지는 보험 지출. 부담되는 상황에서도 이어가는 건 만일에 대한 줄지 않는 두려움 때문인데, 손해를 물어 준다는 보증마저도 혜택은 줄고 금액 갱신이 만연하는 시대다 보니 안심은 점점 소멸되어 갑니다.


내쳐지는 건지 내몰리는 건지 모를 변화 속에, 적응하지 못한 건지,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건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 믿고 싶은 건지 방 한편에 남겨둔 옷처럼 삶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직은 이 모든 변화가 낯설기만 합니다.



Painter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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