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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Jul 05. 2023

죽빵을 날리고 나와버려요

우리는 소중한 사람이다.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는 어느 날에도
누군가에게는 늘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다.

-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 글배우 -





또라이와 상또라이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되지 않는 일이 있음을 알아서인지, 나의 욕심이 나를 휘감으면 중요한 것이 보이지 않고 작은 것에 집착하게 되어 일을 그르치게 된다는 깨달음을 얻어서인지, 이 연애에 아무런 욕심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두어야겠다 생각하고 연애를 시작했다.


다시 설레게 된 것도 신기하고, 누군가를 만나서 같이 길을 걷고 있는 것도 생경하고, 같이 밥을 먹으며 나를 보고 대화하고 있는 J도 고마웠다. 무엇보다 다시 웃고 있는 내 모습이 가장 낯설고도 반가웠다.  


마치 죽다 살아난 사람이 덤으로 주어진 인생을 살고 있는 듯 매 순간이 감사했다.






그래서인지 첫 연애였다면 서운했을 일들이 전혀 서운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다툼으로 번졌을 소소한 사건들은 상대의 말을 믿어주는 것으로 끝이 났다.


예를 들면 둘 다 직장인이었기에 9 to 6의 시간 동안 연락이 오지 않아도 바쁘겠거니 했고, 퇴근 후 내가 헬스를 하고 있는 시간 동안 라커룸에 넣어두었던 휴대폰 부재전화가 일곱 통이나 와 있어도 콜백을 해서

 "운동하고 있었다."

라고 이야기하면

 "그랬냐. 다행이다. 걱정했다."

는 한마디를 한 뒤 다른 대화를 나눴다.


첫 번째 연애에서는 긴 시간 연락이 오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건 내 쪽이었다. 처음이어서 상대와 모든 것을 시시콜콜 다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두 번째 연애에서 나는 가끔 무심한 편이었다. 일하는 시간 동안은 연락을 잘 안 했고, 데이트를 하고 집에 가서는 휴대폰을 던져놓고 내 할 일을 하는 타입이었다. 집에 간 내가 연락이 되지 않아 12시가 넘은 시간에 전 남자 친구가 집으로 찾아온 적도 있었다.

"난 집에 오면 휴대폰을 잘 보지 않아."

라는 나의 말에

"연락이 안 되면 걱정이 된다. 휴대폰은 소리로 해놓고 내 연락에는 회신하라."

는 잔소리를 시전하고 돌아갔다. 나를 챙겨준다는 느낌이 드는 건 좋았는데 구속받는 느낌은 썩 좋지 않았다. 지금까지 데이트하고 왔으면 됐지 왜 종일 연락을 해야 하지 싶었다.


지난 연애였다면

"화장실도 안 가느냐. 그 시간에 짬 내서 연락하면 되지 않느냐.",

 "운동하면 한다 문자라도 남겨야 걱정을 하지 않느냐."

며 다툼으로 번졌을 일들이 서로의 말 한마디를 신뢰하며 일단락되었다. 이전과는 다른 연애에 마음이 편해졌다. 지난 연애를 겪으며 조금 더 성숙해진 내가 기특했다. 동시에 지난 나의 연인들과 J의 지난 연인들에게도 감사했다.


우리는 서로의 지난 연인들에게 감사하며 '지금의 연애'를 했다. 일주일 동안 일곱 번을 만났다. J는 내가 살고 있는 동네로 매일 저녁 퇴근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먼 길을 어찌 매일 왔나 싶다. 충무로 직장에서 군자까지 왔다가 고양시인 집으로 돌아가서 자고 다시 충무로로 출근하기를 거의 매일 반복했다. 내가 운동하는 날 밤 9시가 넘은 시간에도, 야근을 하는 날 10시가 넘은 시간에도 군자까지 찾아와 얼굴을 보고 갔다. 특별한 일을 한 건 아니었다. 얼굴 보고 밥 먹고 수다 떨고, 가끔 영화 보고 나서 영화 이야기를 나누는 게 데이트의 전부였다.






J는 나를 '아가'라고 불렀다. 어쩌다 시작된 별칭이었는데 퇴근길 지하철역에서 전화를 받다가 동료 K가 내 통화를 들어버렸다. 전화를 받자마자 휴대폰 너머로 J가 불렀던

"아가~"

가 너무 크게 들려버렸던 탓이다.


다음날 '우리 U 씨'와 K, 내가 있는 카톡방에서 검은 봉투 공동구매하지 않겠냐는 대화들이 오갔다. 토 나오게 오글거린다고 검은 봉투 공동구매하자며. K는 J를 '아가아빠'라고 불렀다.

 "아가아빠는 잘 있어요? ㅋㅋㅋ"


이쯤 되면 또라이는 내가 아닌데.



  




달달한 연애와는 별개로 회사의 업무는 고됐다. 10시가 넘는 시간까지 야근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업무의 양과 강도는 차치하고서라도 나의 공은 자신이 가져가고 실수는 덮어주지 않는 직속 상사 H의 인성 때문에 골머리를 썩었다. 딱 미생의 성대리 같은 사람이었다.


 차장님이 우리 팀에 내려오셨을 때 일이다. 내가 직접 보고 들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못 믿었을 광경이었다. 내가 기획한 사업 계획서를 H가 차장님께 결재 맡았다.

"이거 괜찮네. 진행해 봐. 자료 수집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애썼어."

하니 H가

"시간 좀 걸렸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답했다. 내가 했는데. 보통 상사들은

"단비씨가 고생 좀 했습니다."

대답하는데 H는 꼭 자신이 한 것처럼 답을 했다.


또 다른 공문 결재받을 때 차장님이 실수를 지적했는데 차장님 앞에서

"아, 아이고 단비씨 ~"

라고 이야기하는 식이었다. 본인이 중간 결재 했을 텐데.


이런 상황을 여러 번 목격했다. 내가 없을 때의 상황은 말해 뭐 해. 얄미로움의 극치. 여우여우. 대체 어떤 가치관을 담지하고 살면 저런 인간이 되는걸까.


더 화가 나는 건 그 H의 대외적인 이미지는 아주 좋았다는 사실이었다. 임원들에게 입의 혀처럼 구는 사람이어서 보고 하나는 기가 막히게 했고, 다른 팀 직원에게는 젠틀하게 웃으며 대화하는 사람이어서 대외적인 평판도 좋은 사람이었다. H에게 치를 떠는 사람들은 모두 같이 일을 했던 동료들이었다.


같이 일을 했던 동료들은 모두 H의 인성을 알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직원에게 들었다. 내가 기획한 사업계획서와 중간 결과보고서를 다 본인이 차장님에게 결재받으며 본인이 기획하고 진행한 일이라고 보고했단다. 알지 알아. 나도 직접 봤는걸. 심지어 450여 명이 참석하는 프로젝트의 기획과 총괄진행도 내가 맡아서 했었는데 차장과 짜고 H가 한 일이라고 환경부 과장에게 보고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물론 그 일을 한 건 나였다는 사실을 나와 직접 공문을 주고받고 전화통화를 하며 일했던 환경부 주무관님이 알고 계셨지만 우리 회사의 인사권은 우리 회사 임원진에게 있으니 소용없는 일이었다. 사회생활 만렙되기는 요요했다.







H와 프로젝트팀을 만들어 홍보작업을 진행한 일이 있었다. H, 나, K, 그리고 또 한 명의 직원 넷이서 일을 진행했다. H는 기획과정부터 셋이 해보라고 시켜놓고 혼자 칼퇴근하고 가버리고, 기획안 제출하면 어디가 잘못됐다 말도 안 하고 다시 해오라고 시키고, 야근해서 괜찮은 기획안을 제출하고 홍보물을 만들어내면 본인이 한 것처럼 윗선에 보고해서 수고했다는 인사는 혼자 듣고..


그래도 난

'방향을 잡아가는 것도 능력이고, 평소에 행정력도 좋고 배울 점이 있으니 그것만 생각하자.'

싶었다. 이렇게 고생하고 억울한 거

'내가 알고 하늘이 알고 상대가 알면 됐지 뭐.'

라고 생각했다. 불만이 있어도

'묵묵히 일하면 언젠가는 알아주겠지.'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H는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프로젝트를 함께 했던 K와 다른 직원은 치를 떨었다.

"다시는 같이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

이라며

"어떻게 몇 년을 그 밑에서 참고 일했냐?"

라고 물었다.


'내가 불만을 가졌던 게 이상한 게 아니구나. 그냥 참고 사는 게 방법은 아니겠구나.'

'그런데 이걸 겪지 않으면 모르는 건데 누구한테 말해도 고자질이 되고 불평불만이 되니 일단 배울 거 다 배우고 나가자. 시간이 지나면 많은 사람이 알게 되겠지.'

결국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자위를 했다.


일처리를 함부로덤부로 해버려서 골탕이라도 먹이고 싶은데 난 또 그게 안 되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과 마찬가지로 퇴근 후 J를 만났다. 좀처럼 회사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그날도 H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무슨 일 있었냐 물어오는 J에게 시시콜콜 말하며 복기하는 것조차 불쾌해서 대강 이야기했다.

"아 ~ 나랑 같이 일하는 직속 상사가 내가 한 일을 자기가 한 것처럼 공은 다 먹어버리고, 부하 직원 실수는 교묘하게 더 드러나게 한다."

했더니 J가 대뜸

"그 새끼 죽빵을 날려버리고 나와버려요!"

했다.


와우! 속이 뻥 뚫렸다.


이전 연애에서도 똑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돌아온 답은

"사회생활은 원래 그런 거다. 어딜 가나 그런 인간들 꼭 있다. 참고 일해라."

였다.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은 왠지 서운해지는 그런 대답.


그런데 죽빵을 날려버리고 나와버리라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특이한 사람이었다. 상또라이, 죽빵 이런 단어를 이토록 달달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라니.



그때 처음 생각했다.

'이 사람 세상이 두 쪽 나도 온전한 내 편이 되어줄 수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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