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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Jul 12. 2023

내려놓는 용기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밖에 없어.
우리의 삶이란 찰나 안에서만 존재한다네.
이걸 알지 못하는 어른들은 청년들에게 '선'의 인생을 강요하지.
좋은 대학, 대기업, 안정된 가정 등 이런 선로를 따라가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라면서.
그래도 인생은 선이 아니라네.

- <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





J는 노래방 동호회와 여행 동호회를 10년 가까이 꾸준히 해왔던, 음주가무를 좋아하고 역마살이 있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데다 비혼주의자였다.


어느 날 서로의 비전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J는 그 당시 일하고 있던 공공기관을 그만두고 국회에 가서 일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하면 되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요. 응원할게요."


죽빵 발언으로

'어쩌면 J가 세상이 두 쪽 나도 내 편이 되어줄 수 있겠구나.'

생각했던 것처럼 J도 하고 싶은 거 하고 살라는 나를 보며

'이 여자랑 평생을 같이 살아도 괜찮겠다.'

생각했단다. 이전 여자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면

"그 좋은 직장을 왜 그만두느냐? 정년까지 안정적으로 잘 다녀라."

라는 답이 돌아왔다며.


아니, 자기 인생 자기가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지며 살면 되는 거지 무슨 자격으로 이래라 저래라야.


얼마 후 J는 국회 공채 시험에 합격했고 본인이 원하던 곳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죽빵을 날리고 나와버리라던 J의 말에 홀가분함을 느낀 나는 오히려 회사를 다닐 힘을 얻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임이 들어왔다.


나는 계획이 다 있었다. 후임이 들어온 그때부터 퇴사를 결심했다. 1년 프로젝트. 후임에게는 사업을 하나하나 가르치며 내가 없어도 전체 사업의 흐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가르쳤고, 그즈음부터 H과장에게는 할 말을 다 했다.


"과장님, 드릴 말씀 있어요."

"응."

"여기서 말고 회의실에서요."

"어? 뭔데 그래? 무섭네."

"과장님, 과장님한테 그동안 행정도 많이 배우고 일도 많이 배워서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런데 전 과장님이 윗 분들에게 예쁨 받는 것만큼 후임들에게도 존경받는 분이었으면 좋겠어요."

미소를 잃지 않고 감정을 빼고 대놓고 할 말을 다 했다. 내가 그동안 속으로 삭인 울분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H과장에게 할 말을 얼마나 상상하고 또 상상했는지 말이 술술 나왔다. H과장은 대외적으로 젠틀함 빼고는 시체였기에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지만 화를 폭발하지는 않고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새로 들어온 후임에게는 잘한다 격려 많이 해주세요. 본인이 한 일은 제대로 칭찬해 주고 실수하면 개인적으로 혼내더라도 윗분들 앞에서는 좀 감싸주시고요. "

"내가 안 그랬던가?"

"네.(단호박)"

"근데 곧 떠날 사람처럼 왜 이래?"

"그동안 10억 예산 둘이 사업하느라 고생했잖아요. 그 정도 규모 예산이면 다른 부서에 다섯 명 넘게 일하는 팀 많잖아요. 저희 팀도 이제 인원 충원했으니 팀워크 좀 다지자고요. 그리고 제 사업은 제가 직접 차장님께 결재 맡아도 될까요? "

"그래.."


그때부터 H과장은 조금씩 변했다. 전체 사업의 70프로 정도 되는 사업 총괄책임을 나에게 맡길 정도로 나를 신뢰했고, 차장님 앞에서 나를 세워주는 말도 간혹 했다. 내가 기획하고 진행한 사업을 직접 결재 맡으니 자기 공으로 포장할 수 없게 돼서 어쩔 수 없었겠지만. 대신 사람들 앞에서

"단비씨한테 혼났어. 아주 무서운 사람이야."

"하극상인 줄 알았어."

라며 나를 돌려 까는 말도 잊지 않았다. 많이 변하지는 않았다.


나를 어느 정도 아는 K는

"언닌 역시 또라이야. 언젠간 웃으며 할 말 다할 줄 알았다."

하며 통쾌해했다.    


난 H과장과 후임과의 팀워크가 최고일 때 퇴사했다. 차장님과 H과장은 퇴사를 만류했고, 나는 10장 분량의 '나의 인생계획서'를 작성해서 브리핑을 한 뒤 퇴사허락을 받아냈다. 그때 가장 큰 계획 중 하나가 글쓰기, 책내기였는데. 6년이 넘어서야 이렇게 시작하다니.









퇴사 6개월 전 어느 주말 나는 J와 함께 강원도 춘천의 모 교회에서 드림팀의 축무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물론 여전한 회사의 업무 강도에 결혼 전전날까지 행사를 쳐내야 했고, 동료들은 결혼을 코 앞에 두고도 이틀이 멀다 하고 야근하는 나에게

"단비 쌤, 결혼 하긴 하는 거죠?

라고 번갈아가며 묻곤 했다. 결혼은 했으나 결혼준비는 우리 엄마와 J가 다 했다. 정신 차려보니 결혼식장에 서 있었다.









J와 약속을 했다. 결혼 후 수년 내에 서울, 인천, 강원도를 제외한 시골에 내려가서 살자고. 서울, 인천, 강원도는 왜 제외하냐고? 10년 넘게 복닥거리며 살고 있는 서울은 당연히 시골이 아니고, 인천은 시댁이 있는 곳, 강원도는 처가가 있는 곳이니까.


결혼은 자고로 경제적, 정신적으로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일이라 생각했던 우리는 물리적으로도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우리만의 삶을 살아보자는 데 합의했다.


이주해서 살 후보지 답사를 시작했다. 주말마다 충청도로 전라도로 떠났다. 주중에는 직방 어플을 통해 우리가 살 적당한 가격의 집을 후보지로 정해 부동산이나 집주인과 약속을 정하고 주말마다 만나러 다녔다. 딱히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집이 마음에 들면 주변 환경이 별로였고 인프라가 좋으면 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 제주로 여름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J의 지인이 서귀포시 남원읍에 살고 있어 그곳에서 며칠을 묵으며 놀러 다녔다.


하루는 J가 우도에 못 가본 나에게 우도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준비하며 동동거리고 배 시간에 늦을까 조급해하며 나까지 닦달하는 그 상황이 너무 싫었다.

"나한테 좋은 거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지금 이렇게 급하게 준비하고 배 시간 놓칠까 봐 상대를 닦달하는 상황이 싫다. 우선순위가 뭔지 다시 생각하자. 둘이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고 싶은 거면 굳이 우도가 아니어도 된다. 그냥 여유 있게 준비하고 발길 닿는 대로 가보자. "

J도 내 말에 동의했다.


우리는 그날 우도행을 포기했다. 서귀포의 한 중국집에서 꽃게 짬뽕과 탕수육을 먹고 길가의 나무그늘에 차를 세워놓고 낮잠을 잤다. 서귀포 남원읍에서 조천읍 함덕 바다까지 드라이브를 했다. 함덕해변에 있는 오션뷰카페 델문도의 썬베드에 누워서 유유자적 바다멍을 때렸다. 여름날 제주의 뜨거운 공기가 살갗에 닿아도 산도록하게만 느껴지던 그런 날이었다.


상수였던 우도가 변수가 되는 순간 더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역으로 우리의 시골 후보지에 없었던 제주도가 유력 후보지가 되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그 길로 서울에 올라가 제주로의 이주를 준비했다.


J와 나 모두 각자의 집에서 '기어이 자기 하고 싶은 건 하고야 마는, 하지만 자기 앞가림은 하며 사는 자식'이었다. 양가 부모님은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지는 것에 대해, 일껏 갖게 된 좋은 직장을 그만두는 것에 대해 아쉬워하셨지만  말린다고 들을 녀석들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계셨기에 우리의 행보를 응원해 주셨다.


일하고 싶었던 국회, 남들이 부러워하는 공공기관 정규직은 더 이상 우리 삶의 1순위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아이가 없어서 홀가분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

라고 말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아이가 없고 제주에 내려와 살고 싶은 모든 부부가 제주에서 살고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라서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적당히 철없고 적당히 자유로우며 한번 꽂히면 끝까지 돌진하는 추진력 갑 둘이 만나서 가능했다고.


하지만 내려놓음을 연습해야 했다. 앞으로 얼마가 될지 모르는 기간 동안 백수로 살며 초조해하지 않고 온전히 제주를 누리기. 줄어가는 잔고를 보며 우리가 포기한 직장을 다시 돌아보지 않기. 경력단절의 시간 동안 사회적 지위를 아쉬워하거나 친구들의 성장을 부러워하지 않기. 새로운 땅에서의 설렘이 앞섰지만 앞으로 닥칠 현실적인 문제들, 고민들도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 고민들을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지 않는 삶을 살기. 지금, 여기 찰나의 순간을 즐기며 살기. 철없고 자유로운 영혼들에게도 나름의 '내려놓는 용기'는 필요했다.


제주로 휴가를 왔다 간지 다섯 달만에 우리는 제주로 이주했다. 퇴사를 했고, 다시 제주에 내려와 3주간 머무르며 집을 구했고, 이사업체와 계약을 했고, 아름다운 나눔 장터에 나가 책이며 옷 등을 팔아 이삿짐을 줄였다.


그렇게 우리는 제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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