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자각을 끊임없이 발견하게 만드는 일종의 시그널이다. 고통과 정면 승부할 때, 고통에게 강펀치를 날릴 때, 우리 영혼에는 비로소 아주 단단한 나무의 심 같은 것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심이 있는 사람들은 인생의 수많은 파도 속에서 나무의 껍질 같은 것이 다 벗겨져 나가도, 결국 살아남아 어딘가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된다.
- <지금, 여기, 하나뿐인 당신에게>, 심영섭 -
제주로 온 우리 부부에 대한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그 좋은 직장을 왜 그만두고 왔느냐? 이제 뭘 먹고살려고 하느냐?"
부터
"진짜 멋있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까지.
함께 일했던 직장동료 K의 반응은 후자였다.
가끔 제주에 놀러 오면 꼭 나를 만나고 갔다. K는 직장생활을 하며 한 해 한 해 차근차근 진급도 하고 월급도 올랐지만 직장동료와 상사, 많은 업무량에 여전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사람이나 업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제주의 자연을 누리며 이전보다 얼굴이 한결 편해진 나를 부러워했다. 본인도 다 내려놓고 시골에 가서 살고 싶은데 그럴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제주에는 세 가지가 없다. 백화점, 도시가스, 지하철.
쇼핑이 스트레스를 푸는 유일한 해결책인 사람들은 제주에서 살기 쉽지 않다. 백화점이 없고, 오프라인 쇼핑 장소가 적어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안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대신 쿠팡 로켓배송이 돼서 웬만한 물품은 이틀 내로 배송이 된다.
구좌읍 안거리 밖거리가 있는 주택에 살았을 때는 LPG가스통을 연결해서 난방을 했다. 한 통에 3만 원이 훌쩍 넘어가는 비용이라 겨울이 되면 난방비 지출이 엄청났다.
5년 전보다는 시내버스가 잘 되어 있고 급행버스도 생겨서 대중교통이 조금 편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제주에서의 주요 이동수단은 자가용이다. 자차를 운전하지 못하면 제주시내에 살고 있지 않는 한 볼 일을 보는데 상당히 불편하다. 도청, 시청, 병원 등 대부분의 인프라는 제주시내에 몰려있다. 나만 해도 조천읍에 살고 있는데 제주시내까지 차로 30분 정도가 걸린다. 구좌읍이나 성산읍에서 제주국제공항까지는 거의 한 시간이 소요된다.
제주를 누리고 제주에서 행복하게 살려면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나는 여자들이 하나쯤 가지고 있다는 명품에 도통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엄마가 누군가에게 선물 받았다며 잘 가지고 다니라던 미니 양가죽 샤넬백을 단돈 5만 원에 아름다운 나눔 장터에 팔아버린 브알못(브랜드 일도 알지 못하는 1인)이다. 자주 가지고 다니지 않는 가방인데 제법 비싼 가격에 팔았다고 이삿짐도 줄이고 돈도 벌었다며 심지어 뿌듯해하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너무 아깝다. 5만 원이라고 말하자마자 낚아채듯 가져갔던 그 아줌마는 아마 구입한 금액의 백배쯤 되는 가격에 되팔았겠지.
LPG가스는 조금 불편했지만 지금은 기름보일러가 있는 집으로 이사 와 한 두 달에 한 번 정도 전화로 주문하면 되니 훨씬 편해졌다.
또 자차가 있어 어디든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해 제주생활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백화점, 도시가스, 지하철이 없는 게 나에게는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K는 달랐다. 회사가 다니기 싫어지면 명품백을 할부로 샀다. 그게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붙잡아준다고. 12개월 할부를 끊으면 적어도 12개월은 다른 생각 하지 않고 회사에 다녀야 하니까. 부득불 회사 존버를 위한 아주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명품백도 하나쯤 갖고 싶고, 좋은 데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싶어서 회사의 월급을 포기한 채 다 내려놓고 제주에 가서 살 수 없을 것 같다."
는 K의 솔직함이 난 좋았다.
단지, 다른 것이다.
K는 나처럼 떠나오는 대신 머무르는 것을 선택했다. 머무르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매일 아침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는 용기, 지옥철을 타고 회사로 향하는 용기, 회사에 가서 보기 싫은 동료와 상사의 얼굴을 맞대고 일할 용기, 나 혼자 오붓하게 보내는 저녁 시간을 포기하고 회식에 따라가는 용기, 목표로 하는 금액을 모으기 위해 차곡차곡 여투는 용기, 파이어족을 꿈꾸며 때로는 주식에 코인에 투자하는 용기 등등.
모두가 내려놓고 떠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용기를 내서 떠나고 누군가는 용기를 내서 머무르는 삶을 살고 있다. 나는 떠나왔지만 떠나온 이 자리에 지금 머무르고 있다. 모든 이들이 떠나고 머무르는 삶을 반복한다.
"나는 용기가 없어 떠나지 못한다."
고 한탄하며 자신을 질책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다. 당신은 매일매일 용기를 내고 있는 사람이라고. 당신의 하루를, 당신의 머무르는 용기를 응원한다고 말이다.
지금 그 자리에 머무르며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존경과 격려와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