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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Jun 28. 2023

그 남자가 언니 또라이인거 알아?

여리고 미숙하거나 닳고 바래거나 모든 나이에는 그 나름의 색깔이 있다.
다시 오지 않을 색깔이 있다.

- 모든 요일의 기록, 김민철 -





'우리 U 씨'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 성당에서 만났는데 단편 영화를 연출하고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탄 영화감독이라고 했다.

"우리 U 씨, 영화 안 좋아하잖아? 웬 영화감독?"

"그러게 ~ 영화는 언니가 엄청 좋아하는데."

자초지종을 들으니 둘 다 해외에서 거주했던 경험이 있어 대화가 잘 통했고 같은 성당에 다니니 청년회 모임에서 매주 만나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며 정이 들어 사귀어 보기로 했단다.


난 '우리 U 씨'의 남자친구를 '영화오빠'라고 불렀다. 영화오빠는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모여 강북청년창업센터에서 한 달에 한 번 다양성영화 상영회를 열었다.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는 각국의 독립영화들을 상영했고 영화 상영 후 각자의 느낌을 나누는 시간도 갖는다고 했다. 영화오빠는 한 달 뒤에 있을 다양성영화 상영회에 나를 초대했다.







J는 영화오빠의 지인이었다.


남자친구와의 이별 때문에 정신 못 차리고 집에만 오면 곯아떨어지던 그 시절 J가 한 통의 문자를 보냈었다.

〔영화형 소개로 연락드리는 J라고 합니다.〕

난 그 문자를 읽씹 한 뒤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오후나 됐을까. 문득 생각난 J의 문자에

〔어제문자를너무늦게봐서답을못했네요. 제가요즘정신이없어서요. 즐거운오후보내세요.〕

라고 관계 종결의 답문을 보냈다.

그 당시 난 문자에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보내는 습관이 있었다.

'이 바쁜 세상에 문자에까지 굳이 무슨 띄어쓰기를 하냐.'라는 생각이 있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J는 기자 출신, 정책컨설팅회사를 거쳐 복지부 공공기관에서 대외협력 업무를 맡고 회사의 전반적인 운영규정 등을 만드는, 행정력 만렙의 글쓰기로 먹고사는 텍스트 덕후였다.

띄어쓰기 하나 안되어 있는 나의 문자를 보고 속으로 외쳤단다.

 '아웃!'


난 이미 안중에도 없었는데.






영화오빠가 다양성영화 상영회에 나를 초대할 무렵 J로부터 다시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지난번 연락드렸었던 J라고 합니다. 주무세요?〕

'이제 잘 시간인데. 뭐 아직 잠들지는 않았으니까.'

 〔아니요〕


바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방금 문자 드렸던 J라고 합니다. 통화 가능하세요?"

"네. 괜찮아요."

'5분이면 끝나겠지. 얼른 끝내고 자야지.'


이 날 J와 나는 4시간 반 동안 긴 통화를 했다. 태어나서 일면식도 없는, 심지어 처음 통화한 사람과 그렇게 오랜 시간 대화한 적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아마 없을 것 같다.


재밌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눈앞에 그림이 그려지듯 경쾌하고 리듬감 있게 설명해 냈다. 보통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나 잘났다는 자랑을 하게 마련인데 농담 같은 자기 어필과 겸손을 담은 자신의 낮춤이 유쾌하게만 들렸고 '이 사람 참 열심히 살았구나. 능력 있는 사람이네.'라는 생각만 남게 했다. 진중함과 유머를 잃지 않는 대화의 결을 유지하며 나의 이야기를 이끌어낼 줄 아는 호기심과 예의를 갖춘 질문들이 내 마음을 열었다. 물론 적당한 중저음의 목소리도 한몫했다.


평일 밤 4시간 반의 통화를 하고 다음날 출근을 하려고 비몽사몽 눈을 떴다. 화장실에 갔는데 웬걸. 눈에 실핏줄이 터져있었다. 맙소사.







회사에 갔는데 K가 물었다.

"언니, 눈이 왜 그래요?"

"아 어제.. "

나도 내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4시간 반? 대박!!"







중간중간 J와 통화하고 문자를 주고받았다. 말맛이 살아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문자도 남달랐다. 잠시 뒤 약속이 있어 어디 나간다는 통화를 하고 나면 운율을 넣어 잘 다녀오라는 동시 형식의 재치있는 문자를 보내왔다. 피식 웃음이 나는 노래 같은 문자에 나도 같은 형식으로 답을 했다.


죽지 못해 끼니를 챙겨 먹던 나였는데 어느새 입맛이 돌았다.

출퇴근길 살피꽃밭의 작은 꽃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어느 퇴근길 J에게 전화가 왔다.

"다음 주에 다양성영화 상영회 가시죠?"

"네."

"저도 갈 건데 거기서 우리 만나요."

"그럴까요?"

"그냥 만나는 건 심심하니까 서로 누군지 알아보고 인상착의 맞추는 걸로. 예를 들어 흰 티에 검은색 안경, 짧은 스포츠머리 빙고. 이런 식으로 먼저 문자 보내서 맞추는 사람 소원 하나 들어주기 어때요?"

"ㅎㅎ빙고를 꼭 넣어야 하는 거예요?

"당연하죠."

"좋아요."   


나와 J는 서로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첫 통화를 하면서 서로의 얼굴을 찾아보지 말자고 약속했다. 외모가 주는 편견이나 선입견에 사로잡히는 대신 대화를 통해 각자가 가진 생각들을 나누며 서로를 천천히 알아가 보는 게 좋겠다는데 합의했다.


첫 통화 후 한 달 만에 만나는 J.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 대사가 생각났다.

[사랑은 풍덩 빠지는 건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서서히 스며들기도 하는구나.]

뭐 사랑까지는 아니었다만

'내가 감당 못할 정도로 아주 뚱뚱한 몸매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같이 다니기 창피할 만큼 아주 못생기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었다.


그러면 뭐. 그다음은 어쩌게.







강북청년창업센터 앞에서 '우리 U 씨'를 만나 같이 들어갔다.

"언니, 오늘 J 씨 만나면 어색할 테니 케이터링 끝나고 영화오빠까지 넷이서 밥이나 먹으러 갈까?"

"좋지."


영화 상영 내내 J가 누구일까를 둘러봤지만 좀처럼 감이 오지 않았다. 영화 상영이 끝나니 벌써 9시. 배가 고파서 케이터링 음식을 허겁지겁 먹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와인색 가죽재킷에 생머리. 아주 식사를 하시네. 그만 먹고 식사하러 나가시죠.〕

'아! 그새 잊고 있었네. 근데.. 빙고가 없네?'

둘러보니 내 쪽을 보고 웃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검은 슬랙스에 연회색 니트, 검은 뿔테 안경. 빙고. 빙고가 빠졌네요. 내가 이긴 거죠?〕


J는 둘이 나가자고 했다. '이것들 봐라'라는 '우리 U 씨'의 시선을 뒤로한 채 둘이 나가서 우리 집 근처의 고깃집으로 향했다. 시종일관 유쾌한 대화와 배부른 식사 뒤에 J는 대뜸

"우리 사귈래요?"

라는 질문을 던졌다.


덜컥 겁이 났다. 지난 이별들과 이후 동굴의 시간들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 다시 사랑에 실패하고 혼자가 되면 어쩌나라는 생각이 내 대답을 막았다.


"다음번 만날 때 답해줄게요."








일곱 장의 편지를 썼다. 처음부터 일곱 장을 써야겠다 작정한 건 아니었고 쓰다 보니 길어졌다.


나는 신앙이 있는 사람이고 내 인생의 가치관에 신은 언제나 있을 거다, 술 담배 하는 사람 감당할 자신 없다, 만남에 대한 소중함과 노력을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 등등 나는 이런 사람이니 감당할 수 있으면 다시 사귀자고 물어봐주고 아니면 여기서 멈추자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이틀 뒤 J가 집 앞으로 왔다. 근처 카페에 앉아 편지를 건넸는데 편지도 읽어보지 않고 대뜸 J가 말했다.

"인생을 살면서 가끔은 일방통행이 필요할 때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이 그때인 것 같아요."

J는 나의 편지가 거절의 편지인 줄 알았던 거다.

'어라? 이 남자 뭐지? 박력 보소.'

이미 난 J에 대한 호감도가 3 레벨쯤은 상승하고 있었다.

"일단 읽어봐요. 천천히 잘 읽어보고 다시 이야기해요."

J는 천천히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 읽고 나서는 말했다.

"우리 오늘부터 1일이네요."









J와 사귀기로 했다는 소식을 '우리 U 씨'에게 전했더니

"J씨가 언니 또라이인 거 알아?"

라는 답으로 축하를 대신했다.


그 말을 J에게 전했더니 웃으며

"일곱 장의 편지를 건넸을 때 범상치는 않구나 생각했다."

며 이렇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내가 상또라이라서."


하 이 남자 어쩜 이렇게 말을 예쁘게 하지. 또라이라는 단어가 이 정도로 스윗한 단어였던가.








그렇게 난 내 인생에 다시 안 올 줄 알았던 연애를 시작했다. 겁은 먹었지만 그 자리에서부터 다시 또 시작했다. 다시 또. 마음이 시키는 대로. 영롱하고 청신한 빛깔은 아닐지라도, 많이 낡고 바랬을지라도, 조금 더 유연해지고 넉넉한 마음으로 그때 나만의 색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뚜벅뚜벅 한 걸음을 다시 내디뎠다.


사랑이든 연애든 배움이든 일이든.. 무엇인가에 주저하는 이들이 있다면 꼭 잘하지 않더라도 빛나지 않더라도 일단 시작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냥 지금의 자리에서 지금 자신이 가진 그 색 그대로 딱 한걸음만 걸어보라고. 그러다 힘들면 그 자리에 잠시 앉아 쉬어가도 된다고. 한 걸음을 내딛고 난 다음 나의 색은 또다시 달라져 있을 거라고. 다시 오지 않을 지금 당신의 색을 충분히 아끼고 쓰담쓰담해 주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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