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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Jun 20. 2023

찌질함의 공유

친구의 조건

아팠던 이야기를 꺼내면서 느끼는 통증은 병든 사람이 느끼는 통증이 아니라 회복 중의 고통이다. 안전하게 공감받으며 자기 상처를 쏟아내는 사람은 그 아픔이 가벼워지는 과정의 아픔이라는 걸 스스로 감지한다. 그래서 아파도 계속 말할 수 있다. 상처가 떠오르고 통증이 시작되는 순간, 동시에 그 위에 빛의 속도로 도포되는 공감에 의해 상처는 새살로 채워진다. 

- <당신이 옳다>, 정혜신 - 




 



J와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J를 소개해 준 친구의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난 그 친구를 아주 자주 '우리 U 씨'라고 부른다. 


 회사동료로 만난 U는 시크하고 심드렁한 말투 속에 유머와 정이 담뿍 녹아 있는 친구다. 멋진 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여자다. 상사에게 살갑거나 잘 보이려 하지 않고 '내가 할 일만 잘 해내면 된다.'는 마인드가 나와 비슷해서 금세 친해졌다. 내가 입사 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 친구는 퇴사를 했지만 이후로도 계속해서 연을 이어나갔다. 


 U와, 내가 기쁨의 집으로 들어가겠다는 걸 말리고 회사-헬스장, 회사-집을 오가며 함께 했던 직장동료 K는 같은 팀의 직속 선후배 사이였다. 다른 팀 선후배와 달리 둘은 유독 서로를 위하며 친하게 지냈다. 내가 입사 후 회사생활에 적응하도록 도와준 친구들도 이 둘이었다. 나와 U 그리고 K는 병맛 유머코드가 비슷해 셋이 종종 만남을 가졌다. 








공교롭게도 내가 여덟 살 연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얼마 후 U와 K도 남자친구와 헤어져서 모두 싱글이 되었다. 


어느 금요일 저녁 퇴근 후 셋이 만나 한강에 갔다. 한강과 집이 가까운 U가 돗자리와 스파클링 와인을 챙겨 왔다. 우리는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서로의 신세를 한탄했다. 


나는 내가 구남자 친구에게 했던 진상 집착짓을 공유했다. "이제는 다시 사랑을 하지 못할 것 같다."며 "혼자 살겠다."는 선언을 했다. 

U는 "이제 더 이상은 문자로 이별을 고하는 찌질한 남자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푸념을 했다. 

K는 일 욕심 때문에 남자와 오랜 기간 연애를 하지 못한다고 "난 연애와 어울리지 않나 보다."라고 한탄했다. 


우리는 술을 마시며 지난 연애담을 이야기하고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했다. 셋이서 고작 스파클링 와인 한 병도 다 비우지 못했으면서. 


그날의 노을은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웠고, 우리는 싱글로 주말을 나기에 너무 아까운 청춘이었다. 








나는 어릴 때 착한 아이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진 아이였다. 늘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고 친구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나의 좋고 싫음에 앞서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는 그런.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하지 않고 싫어도 싫다고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건 성숙하지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람에게는 말해 무엇하나 내 곁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되는데.'라는 그 당시 고차원적 신앙심도 한몫했던 것 같다. 


그런 나의 벽을 무너뜨리게 된 시작은 울산에서부터였다. 태어나서부터 20년 넘게 자라온 동네에서 누군가의 딸, 어느 집 몇 째 등 나를 둘러싼 간판이 아니라 오롯이 나를 A부터 다시 알아야 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가식적일 필요가 없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고 표현해도 괜찮았다. 자유롭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면 그게 내가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드림팀 앞에서 나는 울고 웃고 때론 화내고 기뻐하며 나의 바닥을 보였다. 때론 찌질함의 극강으로 갈등을 겪기도 하고 다시 해결하고를 반복했다. 









나는 친구를 이렇게 정의한다. 찌질함을 공유하는 사이. 그 찌질함의 횟수들이 삼겹줄이 되어 누구도 끊어내지 못하는 든든한 관계가 된다. 


만약 나의 찌질함을 약점 삼아 공격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격이 아니라 뭐 적당히 놀리는 것까지는 봐줄 수 있다. 그 찌질함이 진짜 찌질함으로 느껴지지 않으니 가볍게 놀릴 수도 있는 거니까. 


난 진짜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어느 정도 시간을 함께한 후 찌질함을 공유해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의 비밀, 나의 부족함, 남들에게 말하기 껄끄러운 소심한 마음 등. 그 찌질함이 약점이 되지 않는 사이가 된다면 분명 오랜 시간을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한다. 








U와 K는 서로의 흑역사를 공유하며 지금도 가끔 나를 놀린다. 


"지난번에 뭐랬더라? 이제 다시 사랑 안 한다고 했는데..."




아, 그래서 J와는 어떻게 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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