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배울 점이 있다.
- 현영숙 -
우리 엄마는 결혼 45년 차 주부 9단이다.
우리 엄마 김치는 맛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아삭해지고 시원해지는 게 그 어떤 맛집에 가도 엄마 김치 이상의 맛을 느껴본 적이 없다. 배추김치뿐 아니라 총각김치, 열무김치, 부추김치 등 온갖 종류의 김치 맛이 기가 막히다. 결혼하고 나서 우리 엄마 김치를 처음 맛본 J는 시어머니에게 "엄마, 이제 김치는 안 해주셔도 돼요."라고 선언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털털하신 분인지라 삐치거나 서운해하지 않으시고 "장모님 김치가 맛있냐? 엄마도 한 번 가서 먹어봐야겠다."라고 하시고는 이후부터는 다른 반찬을 챙겨주신다.
이밖에 엄마표라 이름 붙일만한 음식이 또 있는데 바로 두부찌개이다. 얼마 전 내가 좋아하는 한식집인 선흘방주할머니집에 가서 두부전골을 시켜 먹었는데 한 입 먹자마자 J는 "장모님 두부찌개 먹고 싶다."라고 했다. 그 집은 도토리부침개며 취나물만두, 도토리와 메밀면으로 만든 칼국수가 기가 막히게 맛있는 곳이고 갈 때마다 현지인들이 만석인 도민 찐맛집인데 두부전골만큼은 우리 엄마 맛을 따라가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슈퍼마켓이나 분식집에서 간식을 사 먹은 기억이 거의 없다. 엄마는 커다란 오븐에 카스텔라를 직접 구워주셨고 궁중떡볶이, 닭다리 구이, 팬케이크 등의 간식을 매일같이 만들어 주셨다.
그런 엄마가 지난 4월 우리 집에 놀러 오셔서 파스타 만드는 법을 알려달라고 하셨다. 한동리에 살 때 바지락을 직접 잡아 바지락 술찜을 해 먹고 파스타 면을 삶아서 파스타를 해드린 적이 있었는데 엄청 맛있게 드셨었다. 또 한 번은 직접 데친 토마토를 끓여 소스를 만들어 놓고 그 소스를 활용해 토마토 스파게티를 해드린 적이 있었다. 그것도 "참 맛있다"를 연발하며 드시더니
"엄마 파스타 만드는 법 알려줘"
하시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 눈을 마주 보며 학생의 자세를 하고 서 계셨다.
"에이 엄마 요리 잘하면서"
"엄마 파스타는 할 줄 몰라. 자고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해."
오. 우리 엄마지만 멋지다.
자고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는 명언을 남긴 우리 엄마는 그냥 말뿐이 아니라 매일 행동으로 옮기며 살고 계신다.
엄마는 한식조리사자격증, 소방안전관리자 2급, 바리스타 2급 등의 자격증 보유자다. 자격증 취득만 해놓으신 게 아니라 건물의 관리자로 카페의 운영자로 현장에서 활용도 하셨다. 지금은 요양보호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 공부 중이시다.
아, 우리 아빠는 작년에 공인중개사 1차 합격 후 올해 2차 합격을 위해 공부 중이시고.
화요일 아침 우쿨렐레 배우러 가는 길에 라디오를 켰는데 출연자가 DJ와 장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과학자들이 쥐를 가지고 실험을 했는데 '젊은'세포와 '늙은'세포를 주입한 쥐들에게 스트레스 요소를 가하니 '젊은' 세포를 주입한 쥐들은 모두 죽어버리고 '늙은'세포를 주입한 쥐들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는 스트레스뿐 아니라 전혀 다른 새로운 환경에 쥐들을 놓고 실험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보통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노화는 단순히 죽음을 향해가는 현상이 아닌 '생존을 위해 보이는 적극적인 적응현상'이라는 거다. 그러면서 출연자는 마지막으로 "사람은 결국 죽겠지만 그 과정 가운데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려는 노력이 젊게 사는 비결"이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우리 부모님은 나이보다 한참 젊어 보이신다. 어디 가서 나이를 이야기하면 다들 놀랄 정도다. 유전적인 요소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무언가를 배우려는 겸손한 마음가짐과 열린 마음, 성실함을 위해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시는 노력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무언가를 배우려는 겸손한 마음가짐과 열린 마음, 성실함을 위해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노력은 모두에게 필요하다.
'죽빵을 날리고 나오라'던 J의 지지가 있기 전, 후임의 공은 가로채고 과오는 드러내는 H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던 시절 그 시기를 그나마 버텼던 건 "모두에게는 배울 점이 있다."는 엄마의 명언 덕분이었다.
인성은 별로지만 행정력 하나는 인정할만했던 H, 실력은 별로였지만 나름의 방법으로 후임들을 챙겼던 S, 막말을 일삼았지만 계약 하나는 야무지게 따냈던 D, 실수투성이지만 태도와 마음가짐 하나만큼은 엽엽했던 M, 툭툭 내뱉는 말투로 자주 나를 서운하게 했지만 1년에 100권의 책을 읽는 Y 등.
힘든 시기에 내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그곳에 있을 의미를 만들고, 퇴사 전 다른이들이 가진 장점을 배우고 익혀서 나가자는 다짐 때문이었다.
비단 그 회사에서 뿐 아니라 제주에 와서 잠시 몸 담았던 회사에서도 스트레스는 있었다. 장점만 있는 사람도 단점만 있는 사람도 없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일터. 타인은 내가 아니기에 누구도 100% 맞갖은 사람은 없다.
지금 어쩔 수 없이 내가 몸 담고 있는 회사를 계속해서 다녀야 하는 누군가에게 노하우를 알려주고 싶다.
모든 사람에게는 배울 점이 있다. 두 눈 부릅뜨고 아주 잘 찾아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 대부분의 사람이라고 수정하자.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배울 점이 있다.
먼저 몸 담고 있는 회사를 떠나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내 삶의 최종 미션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 뒤 각 사람에게서 찾은 장점 중 내 삶의 최종 미션에 필요한 것들을 내 것으로 익혀본다. 단지 그 회사가 싫어서 당장 나오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회사를 다니게 되는 건 스스로의 영혼을 갉아먹는 일이 되지만 일정 기간 동안 내가 그 회사를 다녀야 할 명분을 만들고 목표의식을 갖게 되면 지금보다 조금은 더 의미 있는 시간들이 될 것이다.
회사만이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나 동아리 심지어 친구나 가족관계에 적용해 볼 수도 있겠다. 어차피 지금 그곳에 있어야 한다면 떠나려는 마음으로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타인의 장점을 내 것으로 만들어 능력도 인성도 만렙자가 되어보기 위해 스스로 또 다른 퀘스트를 진행해보는 것은 어떨까.
죽을 때까지 배우고, 모두에게 배우기.
이거 하나만큼은 우리 게을러지지 말자.
낡아서 상해 가는 대신, 노련하게 익어가자.
꼬장 하게 늙어가는 대신, 너그럽게 넓어지자.
엽엽하다: 기상이 뛰어나고 성하다.
맞갖다: 마음이나 입맛에 꼭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