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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Aug 30. 2023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어


십 대 때는 스무 살이 되어 대학에 가면 당연히 남자친구가 생기는 줄 알았다. 난 스물네 살이 되어서야 첫 번째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대학생 시절에는 서른 살 즈음되면 대기업에 들어가서 과장 정도는 달고 살며 꽤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난 서른 살 즈음 운 좋게 공공기관인 두 번째 직장으로 이직을 했지만 말단부터 다시 시작했다. 


세상에 대한 꿈과 희망이 가득하던 십 대, 이십 대 시절이 아니더라도 알게 모르게 당연하게 생각하는 많은 것들은 여전히 있었다. 


결혼을 하면 몇 년 안에 아이 둘 정도 가진 부모가 되어 있을 줄 알았지만 우리 부부는 네 번의 시험관 시술을 마지막으로 아이를 갖지 않기로 했다. 

반대로 아이가 생기면 헌신적으로 육아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지만 뉴스 기사에서 이미 접했듯 아이를 학대하거나 버리는 부모들도 가끔 있다. 


그래서인지 네 번째 시험관 시술을 진행할 때 직접 삼시세끼 차려주신 엄마와, 춘천에서 평촌 병원까지 매번 운전해 주셨던 아빠의 희생과 사랑이 아직까지 절절하게 내 마음에 감사로 아로새겨져 있다. 










인생의 성장과정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수순들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 중에서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많이 있다. 물, 공기, 전기 등 









제주의 겨울은 푸근하다.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거의 없다.


2021년 몇 십 년 만에 한파주의보가 내리고 3년 만에 엄청난 폭설이 쏟아졌다. 나름 한파에 대비한다고 했지만 부족했다. 한파주의보 이틀째 날 아침부터 물이 나오지 않았다. 마당에 있는 수도관이 얼어버린 것이었다. 대문밖에 있는 계량기를 지나 마당의 수도관을 통해 집 안으로 물이 흘러 들어오는데 마당의 수도관이 얼어버리니 집 내부에 모든 수도관에서 물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읍사무소에 전화를 걸고, 상하수도 본부에도 전화를 걸었지만 뾰족한 해결책을 얻을 순 없었다. 릴 선을 연결해 대문 밖 계량기 안의 수도관을 드라이기로 녹여보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물이 안 나오니 라면 하나를 끓여 먹을 수도, 세수도 할 수가 없었다. 소변보고 물도 못 내리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와서는 물티슈로 손을 닦았다. 냉동실을 뒤져 데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아 끼니를 때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름보일러의 기름이 바닥이 났고, 주유소에 전화했지만 주문이 밀려 하루 뒤에나 배달이 가능하다고 했다.     








 우리는 이참에 자연인 같은 삶을 살아보자며 주어진 환경과 시간을 누려보기로 했다. 주말에는 원래 잘 안 씻으니 불편할 것 없고, 기름이나 아끼자며 보일러 온도를 낮춰놓고 마당에 나가 눈사람을 만들며 체온을 높였다. 오랜만에 두텁게 쌓인 눈을 굴려 철없는 아이처럼 신나 하며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었다.    


 문제는 다시 집 안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몸은 마음과 같지 않은지라 밖에서 눈사람을 만들며 움직였더니 소화가 되며 슬슬 신호가 왔다. 큰 것이 온다. 하필 이럴 때. 이걸 어쩐다. 나는 잽싸게 밖에서 눈을 퍼서 냄비에 담아 녹였지만 퍼온 눈의 반 도 안 되는 적은 양의 물이 만들어질 뿐이었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 잠시 고심하다가 안 되겠다 싶었던 J가 옆집에 찾아가 물을 얻어왔다. 다행히도 옆집은 미리 정비를 해두어 수도관이 얼지 않았다고 했다. 물뿐 아니라 귤도 나누어주셨다. 덕분에 나는 애오라지 급한 볼일을 해결했고, J는 전기포트에 물을 끓였다. 우리는 라면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디저트로 귤도 먹었다. 라디에이터의 온도를 높이고 TV를 시청하며 J와 나는 

“전기마저 끊겼으면 어쩔 뻔했을까? 이웃의 도움에 감사하다.” 

라는 대화를 여러 번 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오후 기온이 영상으로 오르며 다시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딱 하루 반나절 동안의 자연인 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일상에서 당연하게 누렸던 물과 전기에 대한 소중함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2020년.

가족과 친구들과의 만남, 마스크 없이 자유롭게 거리를 다니던 시간, 반가움에 하던 악수와 포옹, 시끌벅적하던 명절, 크고 작은 축제, 꽃구경 단풍구경, 여름휴가 등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세계적 팬데믹 현상 앞에서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되어버렸던 해였다. 


2년 동안 당연하지 않은 당연한 것들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당장 내가 겪은 삶의 불편함 앞에서는 쉽게 무너지는 하루를 경험했다.

   







팬데믹의 주범이었던 코로나19 조차 2등급에서 독감 수준인 4등급으로 하향 조정된 지금. (하향조정되었지만 걸리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니 부디 계속해서 건강 잘 챙기시길.) 마스크 없이 자유롭게 친구들을 만나 악수와 포옹을 하고 명절에 다시금 가족들을 만나러 육지로 올라간다. 몇 년만에 축제와 행사가 재개되었다. 제주도 뿐 아니라 해외를 누비며 여행을 다닌다. 


우리는 다시 또 금세 익숙해지겠지만 잊지 않았으면 한다. 

당연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그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매일 아침 운동 후 샤워할 수 있고 깔끔한 용변보기를 가능하게 해주는 물,

요즘같이 호우가 맹위를 부리는 우중충한 날 밝은 책상에서 노트북 켜고 글을 쓸 수 있게 돕는 전기,      

물과 먹거리를 나누어주었던 이웃의 따스한 온기, 

낳아주시고 길러주시고 아직까지도 노심초사 걱정해 주시는 부모님 은혜와 사랑 

당연하게 누리는 많은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음을 깨닫고 감사하려는 나의 마음까지.


주어진 나의 환경에, 

주변의 내 지인에게, 

주체적인 나에게. 


고맙다,

사랑한다,

기특하다

인사를 건네보는 건 어떨까. 




당연하지 않은 당연한 것들을 곱씹으며 '지금, 여기'의 일상을 다시 감사로 채워본다. 







애오라지: '겨우'를 강조하여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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