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사고하고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폭넓은 공부를 지속한 이들은 교수의 강의를 받아 적어 생각 없이 암기한 누군가보다 현저하게 학점이 낮다. 열렬하게 사랑했던 누군가와 인연이 닿지 않아 결혼까지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수많은 부부들이 원인 모를 이유로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매일매일 차곡차곡 열심히 벌어 내 집 한 칸 마련하고 싶지만 현실이 녹록지 않아 이생망을 외치며 집 대신 위스키와 담배 한 모금으로 소확행을 선택한 청춘들도 있다.(영화 '소공녀' 내용)
성실이 능력임을 아는 나이가 되었지만 동시에 깨달았다. 노력이 배신할 때도 있다는 걸.
제주살이 4년 차가 되던 해. 구좌읍에서 조천읍으로 이사 오며 생애 첫 내 집을 가졌던 다음 해. 결혼 5년 차부터 우리 부부는 시험관을 시작했다. 둘만의 시간을 충분히 보냈다 생각했고, 양가 부모님의 바람도 한 몫했다.
먼저 제주 O산부인과에 가서 검진을 받았다. 둘 다 정상 범위였다.
시험관 시술은 녹록지 않았다. 매일 병원을 오갈 수 없어 아이스박스 안에 며칠간의 주사를 받아왔다. 생리가 시작된 지 2~3일 후부터 며칠 동안 매일 같은 시간 아침 저녁으로 두 대의 주사를 내 배에 찔러 넣고 손으로 질 깊숙이 질정을 넣었다. 처음에는 주사를 제대로 놓지 못해 배에 피멍이 들었다. 호르몬 주사여서 배가 점점 나오고 살이 쪘다. 혼자 화장실에 가서 쭈그리고 앉아서 질정을 넣길 수차례 반복하다 보니 자괴감이 들었다.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꼭 이렇게까지 해서 아이를 가져야 하나?'
'아니, 왜 남녀 둘의 아이를 낳는데 나만 이 고생을 해야 하지?'
'내가 진짜 아이를 갖고 싶은 게 맞긴 한가?'
주사를 맞고 질정을 넣고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는 시간보다 더 피 말리는 시간은 그 과정을 마치고 병원에 가서 피검사 후 임신여부에 대한 통보를 기다리는 반나절의 시간이었다.
수치 0, 내지는 0. 몇으로
"비임신입니다."
를 세 번째 통보받고 나니 몸은 물론이고 마음까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한 번, 두 번은 속이 상하고 말았는데 세 번째 비임신 통보를 받았을 때는 괜찮지가 않았다. 심지어 세 번째 비임신 통보 후 바로 그 병원 간호사가
"다음 시술은 언제로 예약해 드릴까요?"
를 물어서 비임신의 좌절과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분노가 먼저 올라왔었다.
매 달 생리가 시작되면 할 수 있는 시술이 아니라(이론적으로 가능하긴 하나 몸과 마음이 지쳐서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어느 정도 몸을 만들고 다시 시작해야 했기에 세 번의 시험관을 하는 동안 일 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마지막으로 육지 유명한 병원에서 한 번만 더 시도해 보라는 동생의 권유가 있었다. 동생네도 시험관으로 쌍둥이를 얻었다. 아이를 갖기 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녀석이었기에 그대로 포기하는 걸 보고만 있기 아쉬웠던 까닭이었다.
육지의 유명한 난임병원에서 시술을 받기로 했다. J와 두 달가량 떨어져 지냈다. 육지의 부모님 댁에 머물며 엄마가 차려주시는 삼시세끼 밥을 먹고 아빠가 운전해 주시는 차를 타고 강원도와 경기도를 일주일에 두세 번씩 오갔다.
부모님의 정성 덕이었을까. 드디어
"축하합니다. 임신입니다."
통보를 받았다.
전화받았을 당시 병원에서 가까운 동생네 머무르고 있었다. 엄마는 두 눈에 함초롬 물기를 가득 머금고 나를 부둥켜안았다. 동생과 올케는 내 일처럼 행복해하며 축하를 건넸다. 영문도 모르는 두 살배기 쌍둥이 조카들은 그런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소했다. 전화로 소식을 알리니 J도 감격해서 울먹였고 시어머니도 뛸 듯이 기뻐하셨다.
기쁨도 잠시, 계속되는 하혈에 응급실까지 갔다. 결국 왼쪽 나팔관에 착상이 된 자궁 외 임신으로 판명이 났고 왼쪽 나팔관을 절제하는 복강경 수술을 받았다. 잠시나마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세포를 뱃속에 품고 5주 5일 동안 엄마가 되었다가 그 직함을 부득불 내려놓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다. 이후 나는 더 이상 시험관을 하지 않기로 했다.
'나같이 사랑스러운 딸을 가질 수는 없겠구나.'
'나는 엄마가 될 수는 없겠구나.'
라는 아쉬움과 슬픔은 있었지만 동시에
'내가 생각보다 아이를 간절하게 원하지 않는구나.'
라는 깨달음과
'부부만의 삶을 누리는 재미가 크겠구나.'
라는 설렘도 들었다.
비혼주의자였던 J와 딩크족을 꿈꿨던 나의 결혼 전 가치관도 문득 떠올랐다.
우리 부부는 동의 하에 아이를 갖지 않고 지금의 삶을 누리기로 결심했다. 아이가 없는 부부만이 누릴 수 있는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구석구석 누려보자고 이야기 나눴고 조금씩 실천하며 살고 있는 중이다.
내년이나 후년 즈음에는 둘 다 백수가 되어서 육지에 있는 지방을 두루 다니며 한달살이를 해보자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
살다 보면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있다. 나이가 들어가며 모든 것이 명확해질 것 같지만 세상은 여전히 모호한 것 투성이이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명언 역시 거짓임이 밝혀졌다.
어쩌면 그래서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이 많으니 끝까지 고집부리지 않는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일들 투성이라 겸손하게 배움의 자세를 갖게 된다. 노력이 배신할 수도 있으니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하며 집착하지 않게 된다.
다만, '안되면 말고'의 전제는 '일단 시작하기'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해보기'이다. 그 후에는 깔끔하게 돌아서서 미련을 갖지 않는다. 안 되는 걸 알았으니 다른 길을 찾아 나서면 되는 것이다.
내 인생에 '안되면 말고'가 많이 쌓이면 좋겠다. 그만큼 많이 도전하고 또 최선을 다하는 일이 계속해서 생기면 좋겠다. 내 인생에 '안되면 말고'가 하나둘씩 쌓여갈 때마다 나를 조금씩 더 알아간다.
'나랑은 이런 게 맞지 않구나.'
'이건 될 수 없구나.'
'다른 걸 시도해 봐야지.'
'이것보다는 저걸 더 잘하는구나.'
등등.
나를 알아가는 데이터가 쌓이고 스스로에 대해 잘 알게 되면 크고 작은 선택들에 행복해질 확률이 높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