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비 Sep 27. 2023

나만의 루틴 만들기

난 무계획형 인간이다. 아마도 이런 성향은 학창 시절 때부터였던 것 같다.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미리 말해두지만 절대 자랑은 아니다.

시험기간이었다. 안 그래도 벼락공부를 하던 내가 도덕 과목 공부를 전혀 하지 못했다. 도덕 시험 전 시험이 암기 과목이라 시험을 일찍 보고 복도로 나갔다. 다른 반이었던 친한 친구 M이 나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시험 잘 봤어?"

"그냥 대강. 근데 나 도덕 공부 하나도 안 했어. 큰일 났다 야."

"진짜? 이번에 완전 암기던데. 내가 정리한 거 쭉 읊어줄게. 같이 외우자."

도덕 시험 시작까지 20분의 시간 여유가 있었다. 친구는 자기가 노트에 적어 놓은 예상문제를 하나하나 읽어줬다. 20분 동안 초집중해 친구의 목소리를 귀로 듣고 눈으로는 노트에 시선을 고정했다.


시험 시간이 됐다. 와우. M이 정리한 내용이 그대로 시험에 나왔다. 92점을, M은 96점을 맞았다. 물론 난 시험이 끝나고 난 뒤 아무것도 기억에 남는 게 없었다. M은 요점을 뽑아내는 능력에 성실함까지 겸비했고 공부 하나도 안 한 친구가 자기보다 하나 덜 맞았으면 억울할 법도 한데 마치 자기 일처럼 잘했다고 칭찬하며 기뻐해줬다. 스스로는 머리가 나빠 성실하기라도 해야 한댔지만 성실이 가장 큰 능력임을 오랜 시간이 지나 M을 상기하며 깨달았다.


M은 대학원 졸업 후 시험에 합격해 환경연구사가 되었다. 난 연구사 시험도 벼락치기해서 매번 떨어졌다. 당연한 결과였다.


연구사 시험공부도 초초 벼락치기 할 정도로 무계획형 인간인 나는 친구가 약속을 펑크내거나 기존 계획이 바뀌어도 크게 화가 나지 않는다. 속으로

'오히려 좋아! 다음에 보지 뭐.'

를 외친다. 다만 많은 이들이 일정을 조정해서 약속을 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지장을 줄 정도로 급박하게 변경하거나 약속장소에 이미 나가 있는데 펑크 내는 경우면 나도 화는 난다.


직장생활을 할 때에는 일정에 맞춰서 계획적으로 일해야 하므로 많은 훈련이 필요했다. 엑셀에 무조건 D-day를 적어놓고 역으로 환산해서 매일 해야 할 일을 적어 하루하루 to do list를 지워나갔다.


1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며 훈련 했지만 여전히 나는 그날 그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편한 사람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날 그날 하고 싶은 일이 생기지 않을 때다. 살다 보면 무기력이 밀려올 때가 있다.


네 번의 시험관을 끝으로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말자는 결심을 했던 시기였다.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사라졌다. 마음 편히 당분간 쉬어보자 생각했다. 밀린 드라마와 영화보기를 하며 뒹구르르했다. 더 이상 볼 드라마도 영화도 없어질 즈음 잉여인간이 된 것 같아 스스로에게 미안해졌다.


무계획형 인간에게 계획의 필요성이 생겼다. 의미 있는 일을 하루에 하나만 해보자 싶었다. 곰곰이 생각했다.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게 뭘까. 하나였다. 건강. 몸과 마음의 건강.


아침에 일어나서 입을 헹구고 미지근한 물을 한 컵 마시기 시작했다. 몸속 노폐물이 빠져나가고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공복에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30분씩 요가를 할 때도 있었고, 10분 스트레칭을 할 때도 있었다. 내가 몸속에 가스가 많이 차는구나도 알았다. 운동을 하니 몸속 가스들이 마구 배출되며 아침마다 더부룩했던 속이 편해졌다. 하루를 살아갈 몸의 힘이 생기니 무언가 해보려는 에너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운동이 끝나면 5분 큐티를 했다. 매일 하루 한 페이지씩 한 구절의 말씀과 마음 중심을 잡아주는 글을 읽었다. 때로 내 욕심대로, 브레이크가 고장 난 내 성질대로 행동하려 할 때마다 그날의 큐티를 생각하고 마음을 바로잡았다. 5분의 큐티로 하루를 살아갈 마음의 평안이 생겼다. 가끔 스펙터클한 날은 반나절이 못 갈 때도 있었지만.









이 세 가지 루틴은 몸과 마음의 건강 외에도 나에게 부수적인 선물을 안겨 주었다.


작은 것 하나를 실천하는 내가 기특해 스스로를 더 예뻐하게 되었다. 난 행복의 역치값이 낮은 사람이기에 작은 것 하나에 뿌듯함을 느끼면 행복감이 금세 올라오고 오래 지속된다.


매일 작은 일을 꾸준히 하는 습관이 드니 다른 일을 시작해도 되겠다 싶어 한 주의 루틴을 만들었다. 우쿠렐레도 배우고 글쓰기 수업도 신청해서 들었다.

글쓰기 수업을 들으며

'내가 평생 하고 싶은 일이 바로 글쓰기였지.'

라는 각성을 하게 되었다.

글쓰기 수업을 통해 단편 소설을 썼다. 글쓰기 수업을 가르쳐주셨던 작가님께서 수강생들의 글을 묶어 책을 만들어 주셨다. 부지런한 작가님 덕에 나도 생애 처음으로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종비작가님.)

게다가 이렇게 매주 연재를 통해 오롯이 나만의 이야기로 책을 한 권 내려고 한다. 아직 책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나는 이미 벅차게 기쁘다. 마감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여전히 글쓰기는 즐겁다.








혹여나 스스로를 잉여인간이라 생각하고 있다면, 삶이 무기력하다 느낀다면, 또는 무계획형 인간인데 계획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아주 작은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 시작해 보자.


물 마시기, 일어나서 사과 한쪽 먹기, 음악 한 곡 듣기, 영어회화 한마디 따라 하기. 스스로의 마음을 일으키기 위한 일, 몸의 건강을 챙기기 위한 일, 자기 계발을 위한 일. 어떠한 일이라도 좋다.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보자. 사소해도 괜찮다. 오히려 좋다. 미션 클리어의 기쁨을 더 빨리 느낄 수 있다.


나만의 루틴을 만들고 실천하면 지금을, 오늘을 살아갈 힘이 생긴다. 오늘을 살고 나면 내일도 살아진다. 우리에게 존재하는 시간은 늘 지금이니까.


이전 19화 안되면 말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