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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몽 Apr 19. 2024

좋아하는, 좋아하는, 좋아하는 마음 없이 일할 수 있나

좋아하는 마음 없이 회사에 가면

  과거의 고통은 미화되고 사라지기 마련이다. 일을 쉬고 있는 요즘, 어떤 의욕도 없이 월급이 주는 안정감에 중독되어 기계처럼 출근하던 때가 그리워지고 있다. 일을 쉬기만 하면 그동안 생각만 했던 일들을 계획에 맞춰서 실행하고, 잠자는 시간을 제하고 깨어있는 24시간 동안 어떠한 방해도 없이 집중할 수 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성과가 딱딱 나와줄 줄 알았다. 어떠한 방해도 없이 나 혼자 덩그러니 시간 속에 놓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뭔가를 해나간다는 것에 있어서 큰 장애물이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어떤 재촉도 없이, 나 자신의 게으름과 무능과 똑바로 마주 봐야 하는 시간이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세상은 정말 고요히 흘러간다는 것과, 내가 무언가를 하고 내놓는다고 기대만큼 결과가 바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느낀다.


  이럴 때 정신 차리기 가장 좋은 것은, 그때의 일기를 펼쳐보는 것이다. 아무래도 왜 일을 해야 하는지 아무런 이유도 찾지 못했을 때, 나는 제정신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있다.


  "나는 평일에도 행복하고 싶다. 평일의 위경련을 견디면서 주말이 오기를 바라면서 살고 싶지 않다. 쉽사리 오지 않는 주말을 원망하면서 평일 아침에 눈을 떠 지겨운 하루가 또 시작되었다는 생각으로 이를 닦고 싶지 않다. 불 같이 튀어 오르는 마음을 간신히 누르고 누른 채 괜찮다고 조금만 버티면 어느새 만원 지하철에서 인상 가득한 사람들 틈에 아무렇지 않게 서서 나도 그들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고. 의연한 한 마리의 시민으로 내려 꿋꿋이 걸어서 세상에서 제일가기 싫은 곳으로 들어갈 거라고. 어른임을 증명하듯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돌리기 싫은 전화를 반갑게 돌릴 거라고. 퇴근하는 길 공허한 공기를 못 본 척하고 나의 앞날에 남은 30년의 인생도 이와 같을 거라는 생각을 애써 무시하는 데 성공하면 여기 이 자리에 안전한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 거라고. 꾹꾹 누르다 못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압축된 마음으로 겨우겨우 토요일을 기다리고 싶지 않다. 나 스스로를 속이면서 살고 싶지 않다. 괜찮은 인생인 이유를 찾지 않아도 마음으로 느끼고 싶다."


  이 정도 감정은 누구나 참는 거라고, 나 말고 이 지하철에 탄 사람 모두들 그런 표정을 하고 있지 않냐고 스스로 위로했다. 그러나 한 발짝 떨어져서 그때를 바라보니 우울증이었거나 아니면 곧 우울증 진단을 받을 사람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보인다. 어떠한 감정이든 꾹꾹 눌러가며 1년, 2년 시간을 쌓아가다 보면 결국에는 덧나기 마련이고, 어디 하나 망가지기는 참 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에게 중요한 부분은 일을 해나가는 이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시 기록은 할 만한 가치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회사를 좋아했다. 회사에는 나를 단지 후배라는 이유로 자기의 바운더리 안에 넣어주는 선배들의 따뜻함이 있었고, 내가 힘든 직책을 맡았을 때 조금이라도 나를 도와주려고 했던 동료들이 있었고, 사무실 공사 때문에 밤늦게까지 남아있어야 할 때면, 심심하지 않냐고 같이 있어주겠다던 후배가 있었다. 회사는 나에게 월급도 주었고 사람도 주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회사인지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마웠다. 그러나 부서 발령이 뜻대로 되지 않았고, 나는 내가 매일 해나가야 하는 일에 대해, 왜 이 일을 잘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원하는 직무로 이동도 희망해 봤지만, 시간이 지나야 한다고 했다. 그 시간들은 그저 버텨야만 하는 시간이 되었다. 잘 버티면 회사가 알아줄 거야라는 말이 처음에는 위로가 된다. 내가 더 잘해야지 하는 동기부여도 된다. 하지만 조직에서는 그 시간이 1년이 되고 2년이 되고 어느새 5년이 된다. 그러면 언제까지 버텨야 할지 지금 하는 일들이 나중을 위한 교두보가 될지 이 시간이 쌓이는 것일지 스러지는 것일지 알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가 되면 저런 일기를 쓰게 된다. 어쩌면 나는 너무 진심이어서, 그래서 오히려 마음을 닫았는지도 모르겠다.


  면접을 봤을 때가 생각난다. '여기 많이 힘들고 스트레스도 많은데, 왜 이직하려고 그래요? 괜찮아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한껏 긴장한 햇병아리였던 나는 어떠한 가식도 꾸밈도 없이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뱉었다. '저는 일이 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다른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건드리면 툭 나오는 것이 진짜다. 아, 나는 너무 일에 진심인 인간이다. 그래서 나는 내 진심을 존중하고 싶다. 이 일은 되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일을, 그런 일을 해야만 한다. 좋아하는 마음 없이는 안 되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어서, 그 시간들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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