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에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마흔의 버킷 리스트

by 김봉란
ⓒDisney PIXAR Coco

백수를 누린다면 구십 세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세 명 중 한 명이 걸린다는 치매에 걸려 있으려나. 요양원에서 볕 좋은 날, 창가에 앉아 지난날을 회상하는 것으로 삶의 낙을 삼으려나. 어린아이 크리스마스 기다리듯, 손주들이 찾아와 주는 날을 손꼽아 기대하려나. 운이 좋아 거동을 할 수 있고,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파뿌리 된 머리로 할아범과 함께 살아 있다면, 둘이 다정하게 손잡고 생의 마무리 산책을 할 수 있으려나.


웃기지만, 나는 스무 살에, 서른까지만 살고 싶다고 했다. 결혼을 하긴 어려울 거라 생각한 데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들은 인생 계획에서 빠져있었다. 일부러 그랬다기 보단, 그저 생각이 그에 미치지 못했다. 예술가들을 동경했는데, 불꽃처럼 타오르다가 내리막길 없이 번쩍 하고 사라지고 싶었다. 솔직히 말해 서른 이후에는 무대에서 내려올 일만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장수했다. 올해 벌써 두 번째 스무 살을 맞았다. 불행히도, 내가 상상했던 횃불처럼 살지 못했다. 손에 들만한 촛불 정도나 됐을까? 안타깝게도, 내리막을 향해 미끄러질 수 있는 뒷산 언덕에조차 오르지 못한 기분이다. 오히려 정복하고 싶은 산들이 눈에 더 잘 보인다. 하고 싶은 일들이 천지삐까리라 산행이 끝나면 천으로, 시내로, 바다로 항해하고 싶다. 다행히도 호기심은 마르지 않았다.


중학교 때 펼쳐보고 녹슬도록 닫아놓았던 팔레트를 꺼냈다. 25년 만에 수채화 그리기를 배우고 있다. 가볍게 시작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살림을 다 팽개치고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고 싶다. 아이들 뒤치다꺼리하느라 붓을 잡지 못한 어떤 날은 밤 12시에 살금살금 거실로 나와 동이 터올 때까지 그림을 그린 적도 있다. 누구와 비교할 것도 없이, 점수 매겨질 일 없이, 결과물에 대한 압박 없이, 순수하게 쾌락에 빠져버렸다.


새삼 내 속의 숨어있던 예술가가 왜 이제야 나를 불러냈느냐 앙탈이다. 추상적인 말, '나를 찾고, 자신을 재발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제적으로 알겠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예술 활동을 즐거워하고,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열망에 푹 빠지는, 그런 사람. 누가 뭐래서가 아니라, 내가 그린 그림을 더, 더 나아지게 하고 싶어, 다시 또다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다. 그 누구도 아닌 내 맘에 찰 때까지.


나만 그런 건 아닌가 보다. 온라인으로 수채화를 함께 그리고 있는 클래스에서 만난 동기들 중에 많은 분들이 엄마고, 아줌마들이다. 어쩜 그렇게 열심히 특심인지, 이끌어주시는 미술 선생님도 놀라실 지경이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모지스 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녀는 75세에 그림을 시작해서 101살까지 미국의 국민화가로 활동했단다. 그녀가 그린 그림은 모두 합해 1600점이 된다.


꼭 화가가 되고야 말겠다는 꿈을 지금부터 꾸겠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하지만 마흔에 무언가 새롭게 도전하는 것이 망설여질 때, 몸만 간신히 생존한 나무토막 같은 구십을 상상할 때, 코웃음 치며 니 생각은 완전히 틀려먹었다고 통쾌하게 웃고 계실 모지스 할머니가 떠오른달까.




온라인 수업 때문에 아침부터 교육방송을 틀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수업시간이 끝났음에도 티브이는 꺼지지 않았다. 이어지는 프로그램들을 한 귀로 흘리며 집안일을 하는데,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예술 이야기를 쉽고 재밌게 풀어주는 만화가 나왔다. 오늘의 이야기는 빛을 이용한 스테인드글라스 얘기였다. 만화는 실사로 전환이 되면서 독일에 있는 성 슈테판 성당의 창문 속 푸른 유리 걸작들이 등장했다. 작은 바보상자에 비추어지는 이미지였지만,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네이버 블로그 ⓒ와불



이때, 그 아름다움 자체보다 놀라운 설명을 듣게 됐다. 이 작품은 샤갈이 아흔이 넘은 나이에 작품을 의뢰받아 7년간 작업하여 완성했다고. 나는 너무 어안이 벙벙해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세 봤다. 숫자 바보인 내가 아흔을 헷갈리는 건가 싶어서. 예순? 일흔? 여든? 아흔.... 90???!!!! 파파 할아버지가 이런 굉장한 작품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그럴 힘과 영감과 체력이 있었다고?! 샤갈은 98세까지 여기에 혼을 쏟고 작고하셨다.


버킷 리스트에 하나가 추가되었다. 독일의 성 슈테판 성당을 꼭 가보리라.

내 눈으로 직접 보며, 대가의 백세 기운을 받아오리라.

마흔의 심장이 오늘도 주책맞게 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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