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내게 없는 능력이 있어지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나의 회사 생활은 마늘과 쑥이라는 쓰디쓴 경험들을 먹고, 곰이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이었다.
취업이 안 되어서 힘든 날들 끝에 어렵게 직장에 들어갔다. 면접을 볼 때, 이사님이 내게 물었다. 음악을 전공했던데, 예술하는 사람들이 조직생활을 못하지 않나? 괜찮겠나? 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잘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얘기했다. 학교를 다니는 내내 인간관계 때문에 물의를 일으켜 본 적이 없고, 모나지 않은 둥글둥글한 성격이라고. 그래도 이사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힘들 텐데... 라기에 더욱 힘주어 말했다. 잘할 수 있습니다!
신입사원으로 지내는 동안, 매일매일 후회했다. 왜 나는 그때 이사님의 충고를 듣지 않았는가!!! 아침에 출근하러 가는 길이 도살장 끌려가는 길이었다. 3개월을 날마다 화장실에 가서 울었다. 남자뿐이었던 우리 부서는 완전히 군대문화 그 자체였다. 똑같은 한국 땅에서 태어나 살았는데, 이 조직 문화라는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생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기본적인 것들인데, 그때는 기본도 몰랐다.
아침에 일찍 나와서 원두커피를 내려놓는 일이야 조금만 부지런 떨면 되는 일이니 불만이 없었다. 문제는 서열관계에 따라 취해야 하는 행실에 대해 개념이 없다는 점이었다. 제일 먼저 배운 것은 회사 내의 나보다 직급이 높은 모든 분들(신입이었으니 거의 전부)의 이름을 전화번호에 저장하는 일이었다. 번호가 뜨면, “여보세요”가 아니라, “네, 부장님.” 하고 받아야 한다고 지적받았다.
대리님과 함께 외근을 나가는 길이었다. 내가 운전을 못해서 대리님이 운전대를 잡으셨는데, 나는 잠시 멍하니 차를 타지 않고 머뭇거렸다. 날마다 하도 혼났더니, 무서운 대리님 옆 조수석에 타는 게 왠지 어색해서 뒷자리 문을 열었다가 "야, 내가 니 기사냐!!!", 미친 신입이 될 뻔했다.
과장님과 이야기할 때는 대리님을 대리라고 낮추어 불러야 하고, 이사님 앞에서는 과장님이 과장이 되는 존칭 변화도 막 헷갈렸다. 내게 가장 어려운 것은 보고체계였다. 내 일을 대리님께 보고를 하라는데, 어떤 일을 얘기하고 어떤 일은 말아야 하는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내 기준에서는 얘기를 안 해도 될 것 같은 일을 보고하지 않았다가 작살나게 깨지는 일들이 일어나곤 했다. 나의 사수는 어찌나 무서운 사람인지, 정색하면 등골이 서늘해지고 오줌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날마다 나를 한심한 신입사원으로 보는 것 같았다.
그러던 와중에, 아직 3개월 인턴 과정이 끝나지 않았는데, 해외 출장이 잡혔다. 인턴을 해외에 보내주는 일이 본디 없지만 과장님의 영어 통역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배정된 일이었다. 비행기 편을 예약하는 일부터 맡았다. 이번 출장이 명확한 결실을 거둘 수 있을지 없을지 불분명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경비를 아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말만 곧이곧대로 듣고 충성을 다해 제일로 싼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과장님은 모든 허드렛일들을 내게 전적으로 맡기셨다가 크게 낭패를 보셨다. 총체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오로지 경비 절감만 생각했던 나는 미국을 가는 데 두 번인가를 갈아타고, 공항에서 총합 9시간쯤 대기하는 그런 표를 구했던 것이다. 훌륭하게 지시를 따른 신입이었다.
과장님은 영어가 짧으셨다. 나의 역할은 비즈니스 통역이었다. 실제로 통역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어렸을 때 외국에서 살아서 발음이 좋고, 영어회화를 편안히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동행했다. 하지만 비즈니스장에 가기 전에 이미 과장님은 폭발하셨다.
엄청난 비행시간과 대기 시간에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와중에 외국 승무원들만 보이자, 과장님은 내게 은근슬쩍 물으셨다. 여기는 기내에서 맥주 안 주나? 그러니깐, 과장님은 너 영어로 외국 스튜어디스에게 맥주 좀 달라고 해라, 하는 의도의 말이었다. 그러나 답답한 이 신입사원은, 기내에서 맥주를 주는지 안 주는지 묻는 물음에,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하고 내가 받은 주스나 쪽쪽 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찔하다. 그때 과장님이 나를 죽이지 않으시고, 길이 참아 인내하셨던 것에 감사드린다. 나는 이와 같은 일들로 3개월간 혹독하게 혼나며 조직형 인간이 되어갔다. 실은 해외 출장을 동행하며 오해를 받았다. 신입사원이 과장님을 엿 먹이려 작정했다고. 혹은 무시하는 거라고. 하지만 지긋한 시간을 지내보니 그 신입사원의 본심은 진실하고 선했다. 다만 고등교육을 받은 것과 전혀 상관없이 센스와 일머리가 부족해 멍청하게 구는 것이 흠이었다. 수평형 인간이 수직형으로 뇌를 개조해야 했다.
내가 어느 정도 사람 구실을 하고 대리를 달아 부하 직원을 부리게 된 어느 날, 새로 들어온 두 명의 신입 사원 중에 곰과 여우를 데리고 일하면서 옛날의 나를 떠올렸다. 곰을 견디어 가르치는 것이 상당한 고통이었다. 너무 무서웠던 직속 사수가 악마가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좀 미안해졌다. 참회의 시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