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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봉란 Oct 17. 2023

이사했다. 다시, 서울로

프롤로그 : 안산댁



왕복 4시간이 걸렸다.      

좋아하는 작가님의 강연도, 화제의 전시회도, 해외에서 온 아티스트의 음악회도. 대체로 서울에서 열렸다. 거리와 시간의 장벽쯤은 열정으로 뛰어넘던 시절도 있었지만 아이 둘의 엄마가 된 후로는 종종거리며 허들을 넘기 위해 끌어모으던 에너지를,

.

.

.

아꼈다. 토끼 같은 자식들과 여우 같은 남편이랑 함께하는 일상을 지키기 위해.      



지방에서 10년을 지내며 생활방식이 많이 바뀌었다. 서울에 살 적엔 무엇이든 손 닿는 거리에 있다 보니 보고 싶은 것도 많고 사고 싶은 것도 끝이 없었다. 무엇보다 탁월한 배움의 기회들은 발전 가능성에 너를 던져보라고, 더더더 성장시킬 수 있다고 채찍질했다.   

   


‘나’에게 몰두해 쓰는 시간, 돈, 힘, 건강을 타인에게 배분하여 쓰는 법이 낯설었다. 실은, 가족도 타자라 내 아이를 우선으로 생각하고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일은 모성애만으로는 부족했다. 스포트라이트 받는 인생이 되고 싶어 발버둥 치며 진보와 성취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여자에게 중심부에서 내려와 변두리로 옮겨 사는 시간은, 이제 와 생각하니 하늘이 준 기회였다.



하나씩,

두 개씩,

내려놓고 살았다.


처음엔 눈을 질끈 감아야 했는데,

나중엔 흘려보냈다.

내 것 아닌 것들을.



돌아올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정말이다.






서울로 다시 이사 온 후

한동안 입에 불만을 달고 살았다.


“뭐 이렇게 복잡해”

“왜 이렇게 차가 막히는 거야!”

“무슨 죄다 주차금지야. 너무 각박하네.”

“나오면 사방이 다 돈 쓰라는 것뿐이잖아.”

“(아픈 일이 잘 없는 건강한 우리 집 아이들이 독한 감기에 걸렸을 때)

이놈의 서울은 바이러스 천지인가 봐.”        

  


난 서울 사람인데, 지방에서 10년 동안 지나치게  완벽히 적응했나 보다. 인서울 하게 되었을 때 모두 축하해 주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남편의 이직이 아니었다면 자의로 애써 오지 않았을 것 같아 엷은 미소만 지었다. 청년이거나, 혼자 사는 1인 가구였으면 몰라도, 강남 학원가에서 자식들에게 엘리트 교육을 시키고 싶은 거였음 모를까. 지방의 여유로움 속에서 마음 편히 살며 아이들도 자유롭게 자라나게 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 읽었던 이솝 우화 중 [시골쥐, 도시쥐(서울쥐)]에 담긴 통찰이 종종 생각났다.           

시골쥐와 서울쥐 / 한국톨스토이



수개월 동안 서울살이에 적응해 가며 호와 불호를 번갈아 느끼는 동안 나도 모르게 서울 관찰자가 되었다. 몸담고 살 때는 잘 안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지방과 비교되는 어떤 특색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마음에 안 드는 걸 보면, ‘에휴, 서울은 이래서....’ 라며 혀를 끌끌 찼다.      



그때, 10년 전, 지방에 가서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과정을 지켜봤던 지인이 슬쩍 말했다. 결론을 쉽게 내리지 말라고. 더 살아보라고. 변화의 과정에 발생하는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고. 하여 성급하게 들었던 펜을 내려놓았다. 몇 개월 더 그냥 살고 머물러 지냈다.

      


숨을 고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어느 지면에서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했을 수 있다. 서울에 대한 아쉬움들이 독자에게 ‘그래서 어쩌라고’만 남기는 한탄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언젠가는 오도이촌 혹은 이도오촌의 삶을 꿈꾸지만,

일단, 오늘은 내 사는 동네의 뒷골목, 어여쁜 구석들을 구경하러 간다.              


뒷골목에서 발견한 벌새


놀랍게도 이곳에 신비의 세계가 남아있다.     









2014년에 썼던 글을 오랜만에 들춰봤다.

지금과 정반대의 가치관을 가진 내가 글 속에 서 있다.

환경이 정말로 사람을 변하게 한다.

사는 곳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구나.

변두리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겠다.




안산댁             2014.10.13                 

  

버거킹 햄버거를 사 오라는 문자에 남편의 답은 무심하고 성의 없어 보였다. “없어.”

뭐가 없다는 걸까? 햄버거가 다 떨어졌다는 건지, 아니면 돈이 없다는 건지. “뭔 소리야?”

그러자 정말 어이없게도, “버거킹이 없어.”     



아니, 아내가 햄버거 좀 먹고 싶다는데, 귀찮으면 그냥 그렇다고 할 일이지 무슨 저런 뻥을 치나. 문자로 일장연설을 했다. 우리가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렇게 변하냐, 그깟 햄버거 하나 사다 주는 게 그리 힘든 일이냐, 실망이다. 그런데 남편이 그런다.

“정말 없어.”


장난이 지나치다며,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안산 버거킹]


.

.

.


헉!

정말이다.


없다.      



이 동네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편이 직장을 옮겼기에 토 달 수는 없었지만, 연고 없는 낯선 곳에서 새롭게 뿌리내려야 한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마음의 영향인지, 처음 방문하던 날의 풍경은 모두 구리구리해 보였다. 인터넷에 신혼집을 구하려고 [안산 아파트]라고 치면 자동완성 관련어가 함께 떴다. [안산 아파트 성폭행] 단원구 □□동 조두순이 살았던 곳이란다. 뉴스를 떠들썩하게 한 토막살인 사건이 이사 온 후에도 두 번이나 있었다. 지인들이 자꾸 물었다. 그 동네 위험하지 않냐고. 안산이 가진 이미지는 그랬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내가 살던 곳, 연남동은 그렇지 않았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펼쳐지는 번쩍번쩍 홍대 거리에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맛있는 파스타집들이 있고, 최신 유행의 옷집들이 있었다. 트렌디한 건 먹고 입는 것뿐만이 아니다. 요가 하나를 배워도 아슈탕가, 핫타, 프리야 빈야사 등 전문화된 다양한 장르가 있어 골라 들을 수 있었다. 창작이나 문화 관련 수업도 넘쳐났다. 젊은이들 사이에선 그야말로 핫플레이스다.



고향을 그리워하던 나는 틈만 나면 서울 나들이를 갔고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안산에서는 쇼핑도 하지 않았다. 마음 터놓고 얘기할 친구도 사귀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이 갔다.           



그러다 감자 같은 아들을 하나 낳았다. 멀리는 갈 수 없게 되자 드디어 동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감자와 함께 다니면서 나는 많이 달라졌다. 웬만해선 길 가다 만나는 낯선 사람과 말을 섞지 않는 내가 모르는 동네 어르신들과도 자연스럽게 담소를 나눈다. “몇 개월이에요?”하는 질문으로 얘기는 보통 시작된다. 절친도 하나 사귀었다. 말을 가식 없이 시원하게 내뱉으면서도 마음씨는 고운 이이다.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지만, 아기 엄마들에게 나이 따윈 중요치 않다. 정이 많은 그녀에게 내가 많이 배운다.      



그리고... 4월의 어느 날,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갑작스레 안산은 아픔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정정한다. 원래도 안산은 아픔이 많은 땅이었다. 1959년 사라태풍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전북 사람들이 간척사업이 한창이던 이곳으로 이주했다. 강원도 폐광촌에서 일자리를 잃은 무리도 안산으로 몰려들었고 남의 나라에서 설 자리 없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모여 터를 잡았다. 약한 지체들이 많다. 정신병을 앓거나 장애를 가진 힘겨운 분들도.    

  


세월호 사건이 났을 때 그런 얘기들을 많이 했다. 서초동에 있는 고등학교였다면, 이름 있는 국제학교였다면 이렇게까지 무력하게 기다리기만 했을까? 마을의 어려움을 보며 이제야 눈을 들어 함께 살아가는 삼이웃을 곁눈질해 본다. 그리고 생각했다. 신이 일부러 포클레인으로 흙을 퍼 옮기듯 날 들어다 이곳에 심은 건 아닐까? 같이 울라고. 함께 살라고.

도시인의 허영을 한 꺼풀씩 자각하며 벗어보라고.



교회에 있는데 웬 할머니가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찾아오셨다. 목사님을 뵙고 싶다고. 안 계시다 니, 그럼 이것 좀 꼭 전해달란다. 집에서 키우는 닭이 처음 낳은 온기 품은 알이었다.  2014년 지금 이 시대에도, 안산에서는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 따끈하다. 좋다.     



아참! 세 달 전, 7월쯤, 선부동에 버거킹이 오픈했다. 개점한 첫날, 사람들은 백 미터 줄을 서서 기다리며 먹었다고 한다. 참내. 버거킹이 뭐라고. 됐다. 난 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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