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아서 그런 줄만 알았다.
처음엔 그저 귀여웠다.
햇볕에 그을린 아들 뺨 위로 주근깨가 하나둘 올라올 때만 해도.
그런데 부쩍 짙어진 주근깨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아들도 한동안 거울을 볼 때마다 신경을 쓰는 눈치여서
피부에 자극이 덜 하다는 선크림을 하나 사다 줬다.
며칠은 열심히 바르면서 나름 피부관리를 하는 것 같더니
귀찮은지 뒤로는 좀처럼 바르질 않았다.
외출할 때마다 선크림 좀 바르라고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들은 체 만 체.
날씨가 더워지고 햇빛이 강렬해지면서
아들 얼굴의 주근깨는 더 많아졌고 더 선명해졌다.
주근깨가 생기는 건 둘째치고
피부가 하얗고 약한 편이라
햇빛에 조금만 노출돼도 금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요즘 주말마다 밖에 나가 놀면서도
선크림은 죽어라 바르기 싫어하는 아들...
결국 얼굴이 탄 것도 모자라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지난 주말에도 햇빛이 가장 강한 시간.
또 나가겠다는 아들에게 말했다.
"선크림 제대로 바르고 나가. 오늘 햇빛 너무 세."
"귀찮은데..."
"귀찮아도 바르고 나가. 안 그러면 너 오늘 못 나가."
"치... 알겠어..."
반 협박에 아들은 마지못해 퍼프에 선크림을 짜더니,
얼굴에 대충 몇 번 두드리고는 끝냈다.
"그게 바른 거야?"
퍼프를 홱 낚아채곤 선크림을 듬뿍 짜서 아들 얼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이 녀석, 투덜거린다.
눈썹을 찌푸리고, 입을 삐죽이며
"끈적거려서 싫은데..."
"가만히 좀 있어."
"아... 진짜 싫다고..."
목소리 톤이 높아진 아들에게 순간 괘씸한 마음이 올라왔다.
'이게 누구 좋으라고 바르는 건데...'
나는 아무 말 없이 손끝에 힘을 줘서 더 세게 두드렸다.
"아... 진짜... 아파... 이제 그만해..."
아들이 얼굴을 홱 돌렸다.
있는 대로 짜증을 내는 아들 모습에 나 역시 순간 욱했다.
"얼굴 다 타서 껍질이 벗겨지든지 말든지 니 맘대로 해."
퍼프를 집어던지듯 내려놓고는 거실로 나와버렸다.
아들은 말없이 가방을 챙겨 나갔다.
문 닫는 소리마저 성질이 나 있었다.
저녁 무렵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친구 엄마가 김밥이랑 떡볶이 사주신다는데 먹고 가도 돼?"
짜증을 내고 나간 뒤라 혹시나 엄마가 안 된다고 할까 봐 잔뜩 주눅이 든 목소리였다.
"니 마음대로 해."
대답은 듣지도 않고 그냥 끊어버렸다.
아들은 해가 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들어왔다.
땀범벅이 돼서 들어온 아들을 못 본 척했다.
말 한마디 건네지도 않고,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들은 슬쩍 내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씻으러 들어갔다.
그리고 씻고 나온 아들이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나를 조용히 안았다.
나는 말없이 밀어냈다.
"미안해..."
아들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하지만 난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화 낼 일인가 싶었지만
마음 한 편에는 여전히 괘씸함이 남아 있었다.
결국 그날 밤,
아들에게 말 한마디, 다정한 표정 한 번 지어주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내 주변을 계속 맴돌던 아들이 또 한 번 사과를 했다.
"엄마, 내가 어제 짜증 내서 미안해.
근데 선크림 바르면 너무 끈적거려.
세수해도 잘 안 지워지고...
그리고...
선크림만 바르고 나가면 친구들이 자꾸 나보고 가오나시 같다고 놀려.
그래서 그랬어."
그저 귀찮아서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말하지 않은 불편함이 있었다.
끈적이는 촉감, 씻어도 남는 잔여감,
그리고 친구들의 시선.
그런데 나는 그걸 모른 채
억지로 바르려 했고,
짜증에 맞서 화를 냈고
결국 인사도 없이 등을 돌렸다.
그날 밤,
아이가 내 옆에 다가와 안겼을 때조차
그 손길을 밀어냈다.
"그랬구나..."
나는 조용히 말했다.
차마 미안하다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지만
그 한마디에 모든 마음을 담고 싶었다.
그날 밤,
나는 혼자 거실에 앉아 휴대폰을 열었다.
'끈적임 없는 선크림'
'백탁 현상 없음'
'민감 피부'
'남자아이용 선크림'
아이가 좀 더 편하게 바를 수 있는 선크림을 다시 사 주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한 사과일 것 같았다.
*부모 마음 처방전*
1. "싫어"라는 말 뒤엔 감춰진 감정이 숨어 있습니다.
아이의 거부는 때론 귀찮음이 아니라 불편함이나 두려움일 수 있어요.
"왜 싫어?"라고 묻기 전에, "혹시 뭐가 불편해?"라고 다가가 주세요.
2. 사소해 보여도 아이에겐 중요한 감정입니다.
친구들의 놀림, 끈적한 촉감 같은 건 어른 눈엔 별일 아닐 수 있지만
아이에겐 반복될수록 깊은 스트레스가 됩니다.
그 감정을 먼저 이해해 주세요.
3.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아이로 키우려면 먼저 들을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가 꺼낸 말은 용기의 결과입니다.
그 말을 받아주는 태도는 관계의 깊이를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