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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홍색가방 Jul 07. 2020

1년 준비한 시나리오가 계획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지.

- 신인 시나리오 작가 집필 일기, 서문-

3년 준비한 입시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데,
1년 준비한 시나리오가 계획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지.     

수능이 끝난 날, 나는 울면서 고기를 먹었다. 


수능을 마치고, 나는 마중 나온 가족들과 고깃집에 갔다. 맛있는 고기가 구워지는 동안, 나는 미처 수험표 뒤에 답을 적지 못했던 과목을 다시 머릿속으로 풀며 공개된 정답들과 맞춰봤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나는 역대급으로 시험을 망쳤다는 생각을 했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여태 봤던 모의고사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점수들이 나왔다.      


3년, 어찌 보면 12년이란 시간을 평가하는 그 단 하루, 그 하루가 내게는 참 억울한 하루였다. 울면서, 또 고기는 먹으면서, 나는 말했다.      


진짜 나 열심히 했는데...

엉엉 울었다. 참으로 허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단 하루가 나의 모든 노력을 평가한다는 것이 말이다. 그리고 수능 다음 날 재수를 하겠냐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때 나는 두려웠다. 또 1년을 노력했는데, 그 허탈한 하루를 마주할까 봐. 한 번 겪은 실패를 다시 마주하는 일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재수를 선택한 친구들에게 “너 진짜 대단하구나. 용기 있다.”라고 말했다. 난 재수를 하지 않았고, 현역으로 대학교 입학을 했다. (지금은 모교에 입학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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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하면서, 스스로 다짐한 약속이 하나 있었다. 재수를 선택하지 않음으로 인해 지킨 그 1년, 그 1년은 내가 작가를 꿈꾸는 것에 열심히 쓰자고. 그래서 재수를 하지 않고, 작가라는 꿈을 위해 쓴 1년이 후회스럽지 않게 하자고 말이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수많은 공모전에 지원했다. 1년에 20개씩 준비했던 것 같다. 소설, 동화, 단편 영화 시나리오, 드라마, 웹드라마 등등 장르를 불문하고 계속 도전했다. 그 시간들은 내가 실패에 익숙해지는 시간이었다. 나는 실패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시간, 나는 그 시간에 감사한다. 그 결과는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많은 도전 속에서 나는 가끔 좋은 소식을 얻고는 했다. 참 얄궂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포기하고 싶을 때쯤, 기회가 나타나 포기하지도 못하게 날 붙잡는 것이 참으로 얄밉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그때도 포기하자 싶은 때였다. 그때는 취업을 준비해야 할 4학년이었으니 말이다.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진로를 다시 탐색할 겸 휴학을 선택했고, 취업에 대해 알아보면서도 글 한 편만 완성해보자는 개인적인 목표가 있었다. 그렇게 그냥 개인적인 목표로 완성했던 첫 장편 영화 시나리오가 신춘문예 당선작이 되었다. 그때,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토록 원하던 무언가를 완성한 기분이었다. 당장 내 작품이 영상화되는 것이 아님에도 수많은 노력을 인정받은 그런 기분. 그리고 그 당선을 기점으로 영화사와 계약을 하고 시나리오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 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더니, 프로의 세계는 확실히 다른 곳이었다.      


프로의 세계에 발을 살짝 들인 것뿐인데도, 나는 부담감을 가졌고 여러 가지 고민에 빠졌으며, 스스로 얼마나 부족한지에 대해 깨달았다. 다행히 좋은 PD님과 일하게 되어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갈 수 있었지만 동시에 내가 진짜 이 직업과 맞는 사람인가에 대한 고민도 하게 되었다. 장편, 그리고 상업 영화는 내가 단순히 머릿속에 있는 것을 끌어내는 것만이 중요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좋아할, 그리고 극장에 찾아가서 볼만한 이야기여야 했다. 나는 계속해서 창작하며 누군가에게 내 작품을 증명하는 일을 버텨낼 수 있을까란 고민이 들었다. 나는 과연 글을 쓰면서 계속 즐거울 수 있을까 하는 그런 것 말이다.     


그렇게 1년 동안, 시나리오 초고 한 편을 완성했다. 그 1년은 내 부족함을 채우는 1년, 새로운 작업 방식에 익숙해지는 1년, 상업 장편 영화라는 장르에 내가 어울리는가에 대한 고민이 담긴 1년이었다. 밤샘이 익숙해졌었고, 시나리오 외에 다른 글은 많이 못 썼던 것 같다.      


그리고 회사는 초고 검토 후 다른 아이템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피드백을 주었다.

이 시나리오는 상업 장편 영화로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그렇게 다시 나는 0퍼센트로 회귀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수많은 기획안과 자료조사, 구성 등의 단계에서 제일 처음으로 돌아온 것이다. 새로운 아이템을 찾는 단계로 돌아가자고 다짐했을 때, 허탈했던 것도 사실이다. 1년 동안 준비한 것이 0이 되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실패할지도 모르는 일, 한 번 겪은 실패에 다시 마주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3년, 그 이상을 준비했던 수능에서 마주한 첫 실패는

참 억울했다.

그리고 작가라는 꿈을 이루기 위한 도전들의 실패는

참 씁쓸했다. 

지금 다시 새로운 시나리오를 써야 하는 이 시점에서 나는 그 이전의 실패들 덕분에 단단해져서인지,

한 번은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더 도전해보자고 말이다. 지금의 실패는 참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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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준비한 입시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데,

1년 준비한 시나리오가 계획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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