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 수업 과제 중 하나는 <나만의 질감 만들기>였다. 각자의 작업 주제와 어울리는 재료를 찾아 작품을 완성한 뒤, 발표한다.
‘질감’은 자연스럽게 ‘아토피 피부결’로 이어졌다.
내 피부의 질감에 대해, 지금까지는 그저 느꼈을 뿐, 그것을 언어화할 일이 별로 없었다.
‘내 피부는 건조하고 거칠다.’
내가 느끼기에, 긁은 뒤 상처가 나서 피부가 거칠어진다기보다는 외부 환경(온도와 습도)에 따라 피부결 자체가 바뀌는 느낌이다. 세팅값이 달라진다고 해야 할까. 피부결이 거칠어지면, 그때부터 피부가 땅기고, 유난히 가렵고, 그래서 긁어 상처를 내고, 딱지가 앉는 과정이 반복된다.
건조해서 피부가 땅기는 느낌은 정말 조금도 유쾌하지 않다. 너무 불편하고, 거슬린다. 특히 얼굴이 건조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 때마다, 입을 벌려야 할 때마다 부자연스럽고, 피부에 하얗게 각질이 일어난다.(왠지 모르겠지만, 튼 피부는 붉은 상처보다 더 부끄럽다.)
메마른 상태에서, 피부는 작은 마찰에도 쉽게 상처가 나고 찢어지는데, 너무 따갑고, 아프다. - 그럼 또 억울하고 울고 싶고.
늘 이러니, 나에게 피부는 ‘보호’의 역할을 상실한, 얇고 비쩍 마른 껍데기와 다를 게 없다.
가뭄의 땅 같은, 마른 가지 같은, 퍼석하고 거친 내 피부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재료를 찾기 위해 화방을 찾았다.
화방은 자주 가지만, 늘 필요한 섹션만 들러 필요한 재료만 구입했었기 때문에, 이렇게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화방의 재료를 하나하나 보는 경험은 새롭고 재밌었다. 진짜 세상의 모든 재료를 다 모아둔 것 같았다. 특히 건축 목업용 재료 섹션에서 오래 머물렀는데, 그곳엔 건식 재료들이 잔뜩 있었다.
<빨간색 잔디매트>는 만지면 부스러기가 떨어지는데, 이게 꼭 피 딱지와 각질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사포>, 보통 무언가를 둥글고 매끄럽게 다듬기 위해 사용하지만, 나는 사포의 거친 면을 피부 표면이라고 생각하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려보면 새로운 접근이 될 것 같았다.
<젤스톤>도 모래 알갱이가 섞여 있어 표면이 거칠었는데, 좋은 점은 색이 다양했고 (스킨톤도 있었다.)
시멘트처럼 직접 바를 수가 있었다. 처음 바를 땐 촉촉한데, 금방 굳어 건조해졌다. 이 날은 이미 고르게 발린 분홍색 젤스톤 시트를 구입했다.
그리고 추가로 점토(살 표현), 레진(피와 진물 표현), 사포 위에 채색할 오일 파스텔 등을 구입했다.
거친 피부를 가지고 사는 것이 버거운 것처럼, 거친 표면에 그림을 그리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사포 위에 오일 파스텔로 그림을 그리니 오일 파스텔이 금방 닳았다. 4-5000원 치의 재료가 사포에 먹혀 순식간에 닳아 없어졌다.
젤스톤 위 수채화 작업도 붓이 걸려 시원하게 칠해지지 않았고,
잔디 매트 위에 (점토) 살을 붙이는 작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표면이 거칠면 점토가 더 잘 붙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점토가 마를 때, 모서리가 말리면서 잔디 매트와 떨어져 벌어졌다. 그리고 잔디 매트의 부스러기가 작업하는 내내 말썽이었다.
피부도 재료도 - 거친 것들은 대체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듯하다.
작업은 쉽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피부 질감과 제법 유사하게 나와서 만족스러웠다.
다만, 이것이 내 피부와 닮았다는 말을 학생들 앞에서 얘기해야 한다는 것이, 조금 슬프다는 생각.. 을 잠깐 했을 뿐.
발표의 날이 왔다. 지난주, A조의 발표를 듣고 신선한 자극을 많이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조금 걱정이 되긴 했다.
내 차례가 되었고, 피부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화방 전체를 돌아다니며 건식재료를 골라 작업한 것, 각각의 작품들은 어떤 재료를 사용했고 써보니 이런 이런 느낌이 좋았고, 생각보다 작업이 쉽지 않았고, 완성한 뒤 씁쓸했던 감정들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주제도 명확하고 주제에 맞는 적절한 재료를 선택하니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를 납득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학생들은 내가 전달하고자 한 부분에 집중해 작품을 감상하고 질문도 예상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교수님께서도 드로잉에서 부족했던 부분이 이번 과제를 통해 보완이 되었고 한 단계 발전되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피부 표현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깊게 들어가 봐도 좋을 것 같다고. 형태는 크게 중요하지 않으니, 형태를 아예 생략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상기시켜주는 친구도 있었고,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다는 점에 자극받아 자신도 찾아봐야겠다고 말하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교수님께서도 학생들에게 이 언니처럼 화방 가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사보고 직접 써보라고 조언하셨다.
그 외에도
색감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
아토피를 경험한 친구들의 고백
병에 대해 잘 알진 못하지만 작품을 통한 이해와 공감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너무 긍정적인 피드백만 받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재주는 재료가 부리고 칭찬은 내가 받은 느낌이었다.
평소, 펜이나 붓으로, 집착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묘사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재료를 손으로 느끼고 원하는 형태로 만드는 과정이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과제를 하는 동안 재료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컨트롤 하기 힘들었지만, 내가 몇 시간 동안 묘사해야 했을 질감 표현을 재료가 알아서 구현해 준다는 사실을 경험하니 허무하기도 하고 새롭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했다.
적은 노력으로도 최대치의 효과를 볼 수 있구나. 싶었다. 진짜, 재료가 다 했다.
주제에 맞는 적절한 재료, 납득할만한 재료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이번 과제를 통해 처음으로 했다. 누구나 쓰는 재료, 의례 당연히 써야만 하는 재료가 아니라. 납득할 수 있는 재료를 써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재료도 하나의 스토리가 되고 스스로 말하기 시작한다.
텍스처는 작업을 풍성하게 만들고 시각에 머무는 감상이 아닌 그 이상의 감각을 공유하게 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토피의 피부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텍스쳐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도 재료에 대한 고민은 여전하다. 응원을 받았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도 더 다양한 재료를 탐구하고 시도해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