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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boran Feb 10. 2022

<sound and scent> 저마다의 환율

원고와 커피와 강정

코 끝과 귓바퀴를 간질이는 냄새나 소리는 이따금씩 곳곳에 묻혀있던 그 언젠가를 지금으로 불러온다. 음과 향이 모시고 온 곳곳의 기억은 지금의 일상을 조금 더 윤기 있게, 때로는 생경하게, 마침내 조화롭게 완성한다. 음과 향에는 그만한 힘이 있다.







초, 중, 고등학교가 모두 집 근처였던 동생 민석이는 10대 내내 따뜻한 집밥을 먹으며 수월한 통학길을 다녔다.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는 동생을 보내며 '대학에, 군대에, 취업까지.. 이제 남처럼 떨어져 지낼 일만 남겠구나' 싶어 괜한 걱정이 앞서기도 했지만, 그것은 정말이지 괜한 걱정이었다. 동생이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느닷없는 역병이 세계를 덮쳤고, 민석이는 한 학기만에 모든 짐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모든 강의가 비대면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이제 곧 군대 가면 안녕이니, 남은 시간이라도 집에서 같이 보낼 수 있어 기쁘다'라고 생각했지만, 그것 역시 오산이었다. 민석이는 현재 노인복지관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서 군 복무를 수행 중이다. 석이의 고교시절을 괴롭힌 허리디스크 덕분이다. 그러므로 민석이는 여전히 따뜻한 집밥을 먹으며 지낸다. 


그렇게 민석이는 그렇다 할 고생을 겪어보지 않은 채 올해 스물네 살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석이는 가끔씩 길거리에서 고소하고 달콤한 강정 냄새를 맡을 때마다 특정 기억에 사무친다. 그 기억이 나의 기억과 상통한다는 것은 얼마 전에 깨닫게 된 사실이다.


어느 금요일. 나는 친구들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발을 맞추며 백화점 3층을 돌아다녔다. 허기짐 없이, 갈증 없이 들어선 백화점은 걸어 다니기에 아주 최적의 장소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다.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경쾌했던 걸음은 점차 느려지고, 그럴수록 귓가의 리드미컬한 음악은 점점 무뎌지고, 발바닥의 뜨거움은 조금씩 예민해져 간다. 그렇게 별 소득 없이 나가려던 찰나에 평소에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리버시블 아우터가 눈에 들어왔다. 한 면은 내가 좋아하는 검은색이었고 다른 한 면은 베이지 색이었다. 색도 다르고 질감도 다른 그 양면 옷이 나에게는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왔고, 지금이 아니면 안 살 것 같다는 애매한 구매욕이 일렁거렸다.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그렇듯, 지금이 아니면 사지 않을 것 같다면 지금밖에 못 사겠구나 라는 심리로 그 옷을 구매했다. 물론 그 아우터는 실제로 그 정도의 매력이었고, 두 번 입고 중고로 팔아버렸다. 


두 번 밖에 걸치지 않은 그 아우터보다 나는 더 실망스러운 것을 느꼈다. 바스락 소리를 내는 쇼핑백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순간부터 나는 내가 이 옷을 사기 위해 써 나가야 할 원고의 개수를 세고 있었기 때문이다. 110번 버스 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십이만 원.. 그럼 천오백자로 치면 세 개..'

나는 나만의 환율로 새 옷을 산 기분을 적극적으로 망가뜨리고 있었다.


프리랜서가 되고 나서 나에게는 하나의 습관이 생겼다. 바로 모든 액수를 원고의 개수로 판단하는 것이었다. 번역 업무는 비중이 작아 판단의 기준이 되지 못했다. 나름 이 계산 속에도 토너먼트가 존재했다. 이 습관은 나로 하여금 좀 더 현명하게 소비하게 만드는 힘은 있었지만, 이게 모든 일상에 반영되어 버리니 나 스스로가 가난한 계산기처럼 느껴졌다. 퇴사 직후 월급의 2/3을 근근이 벌어나가던 그 시절. 나는 직장인 때보다 돈을 덜 버는 것보다, 이 부분에 있어서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던 어느 날 카페를 운영하는 친구와 함께 식당을 찾은 적이 있다. 같이 밥을 먹다 우연히 어떤 물건의 값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친구가 무심코 이런 말을 했다.


"와.. 그 돈이면 커피가 몇 잔이냐?"


나는 순간 놀랐다. 동시에 위로받았다. 얘도 얘만의 환율로 세상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모두에게 당연할 수밖에 없는 저마다의 환율을 나는 왜 갑갑하게 생각했을까. 


에어팟이 사고 싶었던 동생 민석이는 방학 동안 강정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난데없이 강정 알바를 시작했다기에, 나는 당연히 석이가 좋아하는 닭강정을 만들러 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답이 없던 가족 단톡 방에 외로이 보낸 사진 속의 강정은 닭강정이 아니라 쌀강정이었다. 스무 살 생애 첫 노동이 생각보다 강도 높은 분야였는지 석이는 하루 만에 아르바이트를 그만뒀다. 그리고 얻은 7만 원에 자기 용돈을 보태어 스스로 에어팟을 구매했다. 이제 민석이에게 에어팟은 강정을 열심히 잘라서 얻어낸 결실이리라. 고작 하루 일한 강정 제조일이 얼마나 임팩트가 있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후로 민석이는 수시로 값을 강정으로 계산했다. 


"오.. 그거 살려면 강정 이틀은 잘라야겠는데."


머릿속에 강정을 떠올리며 사뭇 진지하던 석이의 표정이 피곤해 보이면서도 귀여웠다. 이제 나는 새롭게 생긴 나만의 환율을 두 팔 벌려 환영하고자 한다. 문장을 쥐어짜는 노동이 훗날 내 소비를 더욱 빛나게 해 준다는 앙다문 마음으로. 이 마음이 내 노동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주고 있으니 더욱더 확신 있는 소비를 할 수 있겠노라 기대해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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