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eboran Oct 13. 2023

<sound and scent> 파리역 탈출기

음과 향이 데려온 그날의 나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도시 '툴롱'은 도청을 품고 있다는 점부터 많은 부분이 한국의 창원과 닮았다. 그곳의 자그마한 역에서 내가 처음으로 파리행 테제베(TGV)를 탔을 때의 일이다. 한국에서도 심심찮게 길을 헤매는 나를 걱정한 친구는 파리역에 도착한 후 내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거듭 설명해 주었다. 이 친구의 이름은 은혜. 은혜는 한국의 창원에서 프랑스의 창원으로 이사한 지 어느덧 10년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설명 내용은 대부분 기차를 등지고 일자로 쭉 나가라든지, 우르르 나가는 사람들을 뒤따라 가라든지 등 상당히 간단했지만 방향치인 나에게는 제법(?) 유용한 정보였다.


바짝 긴장한 상태로 친구의 걱정을 거듭 되새기며 올라탄 테제베는 신식인 듯 낡아있었고, 매우 빨랐으며, 너무 좁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테제베 안에서 4시간 내내 풍기던 특유의 냄새다. 아주 불쾌하지는 않은데 어딘가 컥 막히는 듯한.. 그 어디서도 비슷한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는.. 그런 냄새가 났다. 내 데이터에 입력된 비슷한 향이 없으니 비유할만한 향도 없다. 하지만 그 냄새의 불쾌함 만큼은 비유할 수 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 사람이 꽉꽉 들어찬 지하철에 탔을 때 나는 냄새와 맞먹을 정도로 불쾌했으니까. 나는 그 냄새가 프랑스 전역의 테제베가 아닌 내가 탑승한 칸에서만 우연히 났던 냄새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툴롱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같은 냄새가 나를 괴롭혔다)


불편함과 함께 동승해서일까. 기차는 빨랐지만 체감 탑승 시간은 4시간 반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기차가 파리역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챙겨 온 짐가방과 나가야 할 루트를 몇 번이고 되뇌며 하차 준비를 마쳤다. 역에 도착하면 정환이와 정환이의 동료가 역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예정이었다. 내 짐을 받아주며 '고생했어'라고 말하는 정환이의 얼굴을 상상했다. 하지만 역에 내렸을 때 그와 그의 동료는 어디에도 없었다. 당황한 나는 역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오기를 몇 번 반복했다. 그렇다고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찾아보기엔 더 어긋날 확률이 높았다. 하필 역에서는 데이터가 잘 터지지 않았고 배터리마저 간당간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역 안을 가득 채운 승객들 사이에서 나는 느려터진 데이터를 붙잡고 정환에게 간신히 연락했다. 나는 도착했는데 왜 너는 없냐며 스멀스멀 올라오는 분노와 불안감을 텍스트에 꾹꾹 담아 보냈다. 몇 년 같던 몇 분의 시간이 지나고, 예정 시간보다 회의가 늦게 끝나 최소 40분 이상 지체될 예정이라는 답장을 받아야 했다. 애초에 이들이 회사에서 출발하지도 않았으니 나 혼자 어설프게 역 주변을 찾아보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짜증이 나고 불안했다. 반갑지 않은 소식이었지만, 이해가 가는 이유이기에 별말 없이 나는 역 안에 앉아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해가 진 파리역전은 분명 위험할 테니까. 


하지만 정작 위험한 건 모든 승객들이 빠져나가고 난 파리역 내부였다. 구석에 콕 박혀서 폰이나 보자는 마음에 아주 잠깐 골똘히 메시지를 주고받은 것 같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순식간에 역 안이 휑해져 있었다. 그 많던 사람이 언제 다 여길 빠져나간 건지. 시끌시끌 정신없었던 역 안에 어느새 어둠과 고요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정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이어폰을 빼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 순간 저 멀리서 저벅저벅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차라리 아무도 없었다면 좋았을 텐데. 어디선가 정체 모를 남자들이 우르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향한 방향은 정확히 내가 앉아있는 의자였다. 꽤 앳된 얼굴에, 꽤 허름한 차림을 한 열 명 남짓의 남자아이들이었다. 특히 맨 앞에 서있던 남학생이 유독 많이 웃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한국으로 치면 고2, 고3쯤 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는 뻘쭘한 표정으로 그의 미소를 따라지었다. '그래.. 웃어라.. 나도 웃을게..! 그렇게 환하게 웃으면서 고대로 밖에 나가주라..' 나는 평범한 표정 속에 처절한 심정을 감추고 기도했지만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싱글싱글 웃으며 점점 더 나를 에워쌌다. 


그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한달살이는 무슨.. 서른도 못되어보고 내가 이 먼 타국에서 뒈지는구나.. 나도 모르게 상황을 부정적으로 빨리감기하고 있었는지도. 여전히 실실거리던 파리의 청년들은 내 얼굴, 내 몸, 그리고 내가 들고 있는 가방을 당당하게 훑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애매한 표정으로 그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췄다. 제발.. 지나가 줄래?라는 간절한 마음을 눈빛으로 열심히 보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좋다. 이들이 나를 아주 우습게 본다는 것을 충분히 파악했다. 그렇다면 나도 이들에게 어떤 언행을 취해야 할지 선택해야 할 차례였다. 하지만 한 달 여행 경비를 가방에 담고 있던 동양여자로서, 내 선택지는 딱히 없어 보였다.


'빠흐동.. 농 프렌치! 농 프렌치!'


비굴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나는 빠흐동을 외쳤다. 아무것도 미안하지 않은데 내 입에서는 왜 연신 빠흐동이 남발되는가. 파리에서는 미안하다는 뜻의 '빠흐동' 한마디면 누구든 잔잔히 돌아있는(?) 너를 이해해 줄 거라고 얘기했던 은혜의 말이 기억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최대한 그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치며 아쉽지만 나는 불어를 못한다며 어필했고, 그들은 내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흥미로웠는지 나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더니 나를 대놓고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불어도 아닌, 영어도 아닌, 한국어도 아닌 만국공통 바디랭귀지로 나를 코너로 모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 중의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은은한 무시가 느껴지는 미소와 함께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나 역시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배가 고프니, 돈을 좀 달라는 뜻이었다. 오.. 신이시여. 나는 속으로 이미 오열 중이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다른 어떤 말을 해서라도 이 분위기를 환기하고 싶은데 할 말은 없고 가방 속에 돈은 많았다. 몇 유로만 꺼내려다 가방 전체를 뺏길 것 같았다. 그럴 경우 가방을 사수할 여분의 목숨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역 밖으로 달려 나가고 싶었지만 출입구까지 족히 300미터는 돼 보였고, 역의 안과 밖에도 사람 한 명이 없었다. 직원조차 보이지 않았다. 망할 불란서! 정말 일 안 한다 일 안 해! 입안에서 한국 욕이 넘실거렸다. 사람들 뒤꽁무니를 따라 나가라고 말해주던 은혜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가능하다면 전화 한 통 걸어 말해주고 싶었다. 으내야 뭐 해? 난 지금 x 됐어!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덩달아 내 배를 문질렀다. 나도 배가 고프니 제발 꺼져달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대장 녀석은 금세 제스처를 바꿨다. 배고프다던 녀석의 손가락이 갑자기 K-하트 표시처럼 바뀌었다. 가만 보니 그 두 손가락은 사랑의 하트가 아니라 캐시를 표현하고 있었다. 엄지와 검지가 당당하게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음식은 은유였으니, 가진 돈을 내어달라고 보다 뚜렷하게 표현하는 중이었다. 

내한테 돈 맡겨놨나…. 화가 났지만 화를 내지 못하는 이 상황이 너무 서러웠다. 나도 너희를 무섭게 하고 싶은데! 얘네는 여전히 날 보며 웃고 있었다. 여전히 오지 않는 정환이도 미웠다. 여전히 꽁무니 하나 보이지 않는 역무원도 미웠다. 갑자기 호보백을 맨 손과 쇼퍼백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절대 이 돈을 뺏기지 않으리…. 미움이 만들어낸 힘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악어 한 마리가 보였다. 바로 내 쇼퍼백과 대장 녀석이 신고 있던 운동화에 박혀있었던 라코스테 로고였다. 국적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그와 나 사이에 어쩌면 유일한 공통점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지푸라기를 잡듯 그 악어를 물고 늘어지기로 했다. 


-라코스테!

-?


그들은 처음에 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줄곧 가방의 악어를 가리키며 '라고슽? 라코스흩?' 등 온갖 가짜 불어를 남발하자 어떻게든 교감하려 발악하는 모습이 조금 내비친 듯했다. 이내 곧 청년들이 아아! 하고 내 말을 알아차려주었다. 나는 간신히 꼬리와 촉수를 연결시킨 나비족처럼 기뻐하며 본격적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라코스테 프랑스 브랜드 아니냐고, 나 라코스테 너~무 좋아한다고, 니 신발이랑 내 가방이랑 둘 다 라코스테라고, 그러니 하이파이브하자고…. 은은하게 돌아있는 나의 활력 발산쇼를 목격한 청년들은 쭈뼛거리며 나와 한 명씩 하이파이브를 했고, 그중 한 두 명은 한 두 걸음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굳히기 한 판을 위해 퍼포먼스를 추가했다. 


-실부쁠레?


뒤에 서있던 청년들은 이미 하나둘씩 내 가방에 관심을 거둔 듯 보였다. 갑자기 활력이 넘치는 코리안 우먼에게 생소함 또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는지.. 그들이 결국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맨 앞에 있던 대장이 그대로인 이상 이 상황은 그리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어차피 낼 용기라면 조금만 더 많이 내야겠다 싶었던 나는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모르는 사람을 위해 설명하자면 '실부쁠레'는 영어로 'Please'다. 역시 은혜덕에 알게 된 기본 표현 중 하나다. 어느 나라를 가든 '미안합니다'와 '부탁합니다'는 무조건 알아야 하는 게 맞나 보다. 그는 잠깐 당황하는 듯 보였지만 이내 곧 갸륵한 표정을 지으며 내 악수를 받아주었다. 그리곤 돌아섰다. 돌아선 그의 손에서 치토스 비슷한 냄새가 났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그대로 손을 씻으러 갔다. 

은혜의 남편, 트서방에게 배운 욕 쀼땅! 쀼땅!을 속으로 외치며..


그렇게 1933년도에 태어난 악어 한 마리가 1991년도에 태어난 보란이를 구제해 주었다. 나는 순간 뿌듯했지만 한편으로 슬펐다. 내가 왜 이런 없었어도 되는 일을 잘 견뎌냈다며 기뻐해야 하는가!


거짓말처럼 5분도 되지 않아 정환이의 차가 파리역 앞에 도착했다. 마음 같아서는 차 문을 열자마자 '니 회의가 늦어진 동안 나는 파리 양아치들한테 다 뺏기고 숨질뻔했다!'라고 투정을 부리고 싶었지만, 동료가 함께였기에 모든 말을 삼켰다. 그렇게 나는 호텔로 향했다. 


아직도 파리역과 엇비슷한 쿰쿰한 냄새를 맡으면 그때의 악몽이 떠올라 털이 삐죽 설 때도 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때와 똑 닮은 냄새도 아닌데 그저 쿰쿰한 냄새만 나면 버릇처럼 그때를 떠올리는 것 같다. 살면서 그만큼 불쾌하고 공포스러운 일이 딱히 없었으니까. 딱 봐도 나보다 어려 보였던 그놈들. 그때의 그 청년들이 더 이상 배고프지 않기를 바란다. 배가 너무너무 많이 불러서 기차에서 갓 내린 여행자를 골라 등쳐먹는 행동을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전 06화 <sound and scent> 반신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