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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boran May 12. 2023

<sound and scent> 수인당에서

 

코 끝과 귓바퀴를 간질이는 냄새나 소리는 이따금씩 곳곳에 묻혀있던 그 언젠가를 지금으로 불러온다. 음과 향이 모시고 온 곳곳의 기억은 지금의 일상을 조금 더 윤기 있게, 때로는 생경하게, 마침내 조화롭게 완성한다. 음과 향에는 그만한 힘이 있다.






보통 사찰이라고 하면 맑은 공기에 그림 같은 풍광을 자랑하는 산속 깊은 곳에 자리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무각사는 그렇지 않다. 무각사는 광주광역시의 최대 번화가 중 한 곳인 상무지구에 위치한 도심 속의 사찰인데, 518 기념공원을 방문하면서 자연스럽게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무각사는 원래 상무부대 군장병들의 군법당으로 사용된 곳이다. 훗날 상무대가 장성으로 옮겨가면서 상무대가 있던 자리는 현재의 상무지구가 되었다고 한다. 사찰뿐만 아니라 518 기념공원의 곳곳을 걸었을 때는 왠지 모를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나에게는 이번이 생애 첫 광주여행이었는데, 나는 그저 상무지구를 인스타그램에서 '#광주핫플 #광주술집 #광주가볼만한곳' 이 세 개만 검색하다가 찾아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찰 입구의 불이문 안에 모셔진 사천왕의 늠름한 자태를 보며 경내로 들어섰을 때, 예상을 벗어나는 무각사의 첫인상이 마침내 눈에 담겼다. 지척에 마치 전시회장을 방불케 하는 현대적이고 세련된 사찰 건물이 보였기 때문이다. 도심 속의 사찰답기도, 내가 알던 사찰답지 않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 스님은 양각으로 수놓아진 외벽의 곳곳을 청소하고 계셨다. 오가는 사람이 워낙 없었던 시간대라 그런지 그 스님은 다소 어리벙벙하던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셨다. 선뜻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있던 우리의 모습을 읽으셨는지 '마음 편히 들어가도 된다'고 알려주셨다.


일반적인 크기의 대강당을 대여섯 개는 붙여놓은 듯한 내부의 크기는 외관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욱 전시회장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한 편에는 카페 같은 공간이, 다른 한 편에는 큼지막한 피아노가, 그리고 다른 곳에는 법당이 줄지어 있었다. 모던한 공간에서 풍겨오는 향냄새가 조금은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낯설면서도 친숙한 향이었다. 뻔하지 않은 곳에 찾아온 것 같아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상무지구의 유흥을 즐기러 가기 전에 이런 의미 있는 공간에 방문하다니. 뭔가 생산과 비생산의 퍼즐 조각이 맞춰진 것 같다는 가뿐한 생각에 나는 무척이나 신나 했다. 소리 없이 조금씩 까불거리는 내 발걸음을 본 정환이가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그 마저도 웃겨서 큭큭거렸다. 마음껏 떠들 수 없을 때 더 떠들고 싶은 수업시간의 묘미를 닮은 재미가 느껴졌다. 그때 먼발치에 자그마한 수인당이 보였다. 시주금은 대웅전 말고 저기에 두고 가자. 정환이가 말했다.


수인당 안에는 단 한 사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여자는 한참을 엎드려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머리맡에는 3개의 향이 조용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방석을 들고 내 자리를 찾으면 그만인 것을, 나는 왠지 시주금을 들고 그의 뒤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어쩐지 나서지도, 나가지도 못하겠는 기분이 들었다. 여자는 부처님 앞에서 마음껏 울고 있었다. 숨소리는 목소리가 되고, 목소리는 흐느낌이 되어 수인당 전체에 퍼져나갔다. 사람이 너무 없어 작은 기침 소리마저 사방에 울려 퍼지던 그 공간에서, 바깥서부터 킥킥거리던 내 웃음소리와 발재간소리를 들었으려나. 나는 그렇게 멍하니 수인당 끄트머리에 서서 그의 슬픔을 관망한 것 같다. 들숨에 쏟아져 나오는 목소리는 등과 함께 수없이 흔들렸다. 


결국 자리에 앉지 않기로 한 우리는 수인당을 나와 대웅전으로 향했다. 그러다 무각사를 떠날 때쯤 그를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엎드려 흐느끼던 여자의 얼굴을 궁금해하는 나 자신이 싫었지만, 언제나 머리와 마음은 따로 논다.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던 것 같다. 그런데 여자의 얼굴은 내가 상상한 것과는 조금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개운한 얼굴. 밤새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나 갓 세수한듯한, 깨끗하고 시원한 표정. 

나는 어떤 표정을 상상했던 걸까. 상실에 파묻혀 지옥 같은 표정을 기대했을까. 금방이라도 삶을 놓고 싶은 사람의 맥없는 표정을 기대했던 걸까. 


광주의 핫플에서 또 다른 핫플로 옮겨가기 전, 도심 속에 있는 가볼 만한 곳이라 여겨 일말의 양심인냥 방문했던 광주 무각사. 나는 그곳의 수인당에서 넘겨짚기에도 죄송스러운 무언가를 느꼈다. 그 후로도 나는 가끔씩 정환이와 가까운 사찰을 걸으러 간다. 우리 둘에게 종교는 없지만, 그 누구든 품어주는 것 같은 자연 속 부모 같은 곳. 주변 곳곳의 사찰들은 관내 홍보단 일을 맡게 되면서 더 자주 가게 되었는데, 덕분에 수덕사와 선황사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소담한 절을 많이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묵직하고 편안하다는 느낌 외에는 별다른 느낌을 주지 못했던 절의 향냄새에서, 어쩐지 수인당에서 본 그 사람의 눈물이 자꾸만 겹친다. 수덕사에서도, 다솔사에서도, 소림사에서도. 자꾸만 수인당의 향냄새가 아른거린다. 감히 헤아리지 못할 슬픔, 감히 재단하지 못할 후련함,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상실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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